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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Sep 18. 2021

치워라, 그늘!

김신용의 시 「민달팽이」

너는 감사한 줄을 몰라. 부모는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는 자식에게 혀를 차며 몇 장의 지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청소년 시절보다 훨씬 윤택한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식은 부모에게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그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부모는 생각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러므로 자신이 무언가를 베푼다면 자식은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고 부모는 생각했다. 그것이 자식이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부모는 생각했다.


당신은 미안한 줄을 몰라. 자식은 수십 벌의 옷을 옷장에 걸어놓고도 만 원 한 장에 인색한 부모에게서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의 피땀을 기꺼이 내어놓고도 미안해하는 친구의 부모가 지척에 있었으므로 자식은 자신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욕정의 결과물. 열다섯 살의 자식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태어나길 원한 적이 없었으므로 부모에게 감사해하며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자식은 생각했다. 부모의 세상은 자신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식은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냇가의 돌 위를 /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 꼭 술통 속을 빠져 나온 디오게네스처럼 /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 입어도 벗은 것 같은 衲衣 하나로 떠도는 /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 치워라, 그늘!(김신용, 시집 "도장골 시편" 중 민달팽이)




한때 자식이었을 부모는 부모가 되는 순간 자식으로서 가졌던 모든 생각을 잊었다. 학식이 높은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잘생긴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위트가 넘치는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다정한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긍정적인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진취적인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사람이 부모였더라면... 생각했던 순간들을 잊었다. 그 무엇보다, "가족이란 사회적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존재가 자식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마음을 닫은 자식은 부모에게 결코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부모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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