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용의 시 「민달팽이」
너는 감사한 줄을 몰라. 부모는 내밀었던 손을 거둬들이는 자식에게 혀를 차며 몇 장의 지폐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청소년 시절보다 훨씬 윤택한 환경에서 자라면서도 자식은 부모에게 고개를 숙일 줄 몰랐다. 그것은 불공평한 일이라고 부모는 생각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그러므로 자신이 무언가를 베푼다면 자식은 감사를 표해야 마땅하다고 부모는 생각했다. 그것이 자식이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라고 부모는 생각했다.
당신은 미안한 줄을 몰라. 자식은 수십 벌의 옷을 옷장에 걸어놓고도 만 원 한 장에 인색한 부모에게서 모멸감을 느꼈다. 자신의 피땀을 기꺼이 내어놓고도 미안해하는 친구의 부모가 지척에 있었으므로 자식은 자신의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욕정의 결과물. 열다섯 살의 자식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태어나길 원한 적이 없었으므로 부모에게 감사해하며 살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자식은 생각했다. 부모의 세상은 자신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식은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 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 김신용, 「민달팽이」 전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