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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Sep 04. 2021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문정희의 시 「나의 아내」

신혼 시절, 신부는 신랑의 퇴근이 늘 자신보다 늦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퇴근이 늦는 것이 아니라 집에 발을 들이는 시간이 늦은 거라는 걸 집 앞 술집에서 신랑을 발견하고서야 알았다.


신부가 늦는 날이면 신랑은 집 앞 술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신랑이 그런 이유는 단 하나, 불 꺼진 집에 들어서고 싶지 않아서였다. 신랑이 이상적으로 그린 가정은 신부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따듯한 밥상을 차려놓고 버선발로 맞이하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신부가 이상적으로 그린 가정은 먼저 집에 돌아온 이가 불을 환하게 밝히고 따듯한 밥을 지어 맞이하는 풍경이었다. 신랑은 자신을 버선발로 맞아주지 않는 신부 때문에 화가 났고, 신부는 불 꺼진 집에 들어서지 않는 신랑 때문에 화가 났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 꽃 같은 아내 / 꼭 껴안고 자고 나면 /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 밥을 지어주고 /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 또 시를 쓸 때나 /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 나 바람나지 말라고 /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 내 소유의 식민지 /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문정희,  「나의 아내」 전문)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서 '나의 아내'를 찾았다. 내 소유의 식민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두 사람은 '나의 아내'가 되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콩깍지가 벗겨지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콩깍지는 신랑과 신부를 아내로 만드는 묘약이었다. 묘약의 효능이 사라지자 신랑과 신부는 서로에게 '남편'이 되었다. 두 사람의 남편이 있는 가정은 두 사람의 아내가 있는 가정보다 훨씬 무뚝뚝하고 지루했다.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재잘대지도 않았다. 각자 방을 치우고 각자 일을 하고 각자 차를 끓여 마시고 각자 거울을 닦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신랑과 신부는 종종 외로웠고 '나의 아내'가 그리웠다. 하지만 결코 서로의 아내가 되려 하지는 않았다. 서로에게 아내가 되지 못한 그들에게 콩깍지는 악마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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