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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Feb 14. 2022

한 순정한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시인의 산문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책을 주문했다. 주문한 책을 받아 들고는 4부부터 들췄다. 시인의 근황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 글의 연도는 2013년. 2016년에 발간된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보다 3년이 빠른 글이다. 근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가 무색하다.


산문집은 1989년 이미 발간되었던 첫 산문집의 증보판이다. 말하자면 3부까지는 그때의 내용을 그대로 담았고, 4부를 새로 추가한 것이다. '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4부에는 6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제목을 열거해 보자면, '여자가 여자에게, 일중이 아저씨 생각, 새에 대한 환상, H에게-모든 물은 사막에 닿아 죽는다, 최근의 한 10여 년, 신비주의적 꿈들'.


1989년 11월의 '시인의 말'을 읽어보니 시인은 산문집을 내며 몹시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38세의 현재가 25세 과거의 치기를 바라보는 일이 낯간지럽기도 하거니와 출판사에 대한 채무감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였던 듯하다. 그리고 2021년 12월 '시인의 말'. 시인이 세상에 내보낸 가장 최근의 글을 한참을 곱씹었다. 시인은 이 후기를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근작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에서 시인은 시집에 실린 시에 대해 '한 판 넋두리'라는 표현을 썼었다. 시인의 말처럼 시집은 이전의 작두날 같은 시어에 비한다면 몽글몽글한 순두부 같은 시어로 가득했다. 시의 제목부터 그랬다. '아득히, 어느 봄날, 당분간, 마음에 환한 빗물이, 오늘도 새 한 마리, 오늘 하루 햇빛 빛나는구나, 살다 보면, 들판에서 보리와 밀이, 삶이 후드득, 또 하루가 지나가고, 세상 위 백지에다, 시시한 잠꼬대, 한 그루의 나무가, 아침이 밝아오니, 오늘 하루 중에, 또 하루가 열리고, 슬픔이 새어 나와...' 강렬하고 혹독한 시어 대신 유순한 시어들을 접했지만 오히려 그 시어들로 안도했던 기억이 있다. 시인의 절절한 고통이 덜어진 건가 싶어서였다. 그리고 다음의 시를 읽고 삶에 대한 태도가 변했나 보다 생각했었다.


나는 육십 년간 죽어 있는 세계만 바라보았다 / 이젠 살아 있는 세계를 보고 싶다 / 사랑 찌개백반인 삶이여 세계여 // 창문을 여니 바람이 세차다('나는 육십 년간' 전문)


그때의 짐작대로, 산문집을 읽고 나니 시퍼렇게 벼린 작두날 같았던 초기의 시어를 다시는 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문집에서 말했듯 시인은 그때의 시인이 아니니까.


독보적인 시어를 자랑하는 '일찌기 나는'이 발표된 지도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작두날 같은 시어를 여전히 바라는 것은 어쩌면 독자로서의 이기심일지도 모르겠다. 작가도 어느새 칠순을 넘겼으니 말이다. 마지막 산문(신비주의적 꿈들)에서 시인은 노자의 사상에 천착했음을 고백했다. 그것이 현재 진행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신분열증을 야기했던 서양의 신비 체계를 물리치고 작가를 문학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게 했음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저러한 이유들 때문에 서양 신비 체계는 개인 심리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 가끔씩 사람들에게 신비주의를 권하던 버릇도 끊어버렸고, 나의 허망한 신비주의 공부 때문에 정신분열증이라는 병을 얻은 채로, 이제는 그나마 그 병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문학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래서 요즈음은 문학책들도 부지런히 읽고 있다.(2013, '신비주의적 꿈들' 중에서)"


산문집을 읽고  시인의 시집 네댓 권을 꺼내 다시 읽었다. 이토록 순정할 수가! 산문에서 펼쳐놓은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시에 녹아 있어 깜짝 놀랐다. 각각의 독특함으로만 읽었던 시들이 나침반이 돌아가듯 새롭게 읽혔다. 시집을 읽고 산문집을 바라보니 제목이 잘못되었다.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이 제목은 1989년에 쓰인 시인의 산문에서 따 온 것이다. 시인은 이 산문에서 스스로를 너무너무 게으른 시인이라고 지칭한다.)가 아니라 '한 순정한 시인의 이야기'여야 옳겠다. 순정한 시인은 순정을 뒤로하고 시를 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작두날 같은 시인의 시어에 취했던 독자는 여전히 시인의 시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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