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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Apr 22. 2022

산이 내게 말했다

의정부 망월사에서

오랜만에 절을 찾았다. 망월사. 토끼가 달을 바라본다는 이름의 절. 그리 높은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산을 오르는 길이 그리 험준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맑은 계곡물과 흐드러진 봄꽃에 감탄하며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절이었다.


망월사를 가려면 세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중생교, 천중교, 극락교. '험준'이라고 할 만한 코스라면 극락교 이후의 길. 극락으로 가는 길은 이리 가파른 건가 싶을 만큼 경사가 급했지만 조심조심 천천히 남편과 손을 잡고 오르다 보니 그마저도 오를 만했다.


오르고 보니 거의 정상.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바위 천지다. 그래서인지 널찍하고 평평한 땅에 자리한 여느 절과 달리 바위를 끼고 곳곳에 암자가 흩어져 있다. 덕분에 암자 곳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특히, 영산전에 오르니 의정부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몇 해 전 서대문구에 위치한 안산에 올라 서울 시내를 바라본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전망이다.




종교는 없지만 종교 시설은 종종 방문한다. 사월초파일 즈음이면 절을 찾고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성당을 찾는다. 이렇듯 절과 성당을 즐겨 찾게 된 데에는 여행지에서 만난 절과 성당의 영향이 컸다.


여행지에는 으레 절과 성당이 있었다. 고성의 백담사와 전주의 전동성당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과 마주했다. 당진의 합덕성당과 강화도의 전등사에서는 다채로운 행사로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뿐인가. 경주 불국사에서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에, 고창 선운사에서는 우람하고 흐드러진 동백의 자태에, 양양 낙산사에서는 동해의 절경에 흠뻑 취했다. 절이나 성당은 세상에 이런 풍광도 있구나 싶을 만큼 언제나 뜻밖의 선물을 안겼다. 그리고 바삐 옮기던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고, 복닥한 일상을 경건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했다.


망월사 역시 그랬다. 망월사는 639년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그 시절을 떠올리니 그때의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떤 전망을 보았을까 궁금했다. 당연히 의정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지금과 같은 전망은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았다. 수락산은 여전히 앞에 있었을 것이고 북한산 줄기도 여전히 옆에 있었을 것이다. 그때도 저 아래 산촌에는 누군가 살았을 것이고 하루 세 끼 밥을 지으며 일가를 이루었을 것이다. 1300여 년 전에도 여전히 누군가가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고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았을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돌아봄을 간직한 이들. 내어주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복을 비는 허다한 사람들 속에서 내어주고도 돌아보고도 복을 빌지 않는 사람들이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마음을 뜨겁게 했다. 여전히 극락은 세상 속에 있다.




약수전에서 목을 축이고 생수통에 물을 받아 하산길에 나섰다. 여차하면 퇴근길과 맞물릴 시간이었다. 오를 때와는 달리 쉬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극락교를 지나고 천중교를 지나 중생교에 다다를 즈음이었다.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위틈에 숨은 고양이에게 한눈을 팔다 벌어진 일이었다.


앞서 걷던 남편이 얼굴이 벌져 달려왔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다행히 발도 꺾이지 않고 벌러덩 자빠지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철퍼덕 주저앉은 모양새였다. 옷에 묻은 낙엽과 흙, 지푸라기들을 털어주며 남편이 중얼거렸다. "이젠 산을 오르면 안 되겠어." 남편은 중생교를 지나기까지 팔짱을 단단히 부여잡았다. 괜찮다는 말이 무색하게 발걸음이 한결 편했다. 이제는 넘어지는 일이 큰일인 나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오랜만에 산을 올랐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는 멈춰 서서 바라볼 것, 걸음을 옮길 때는 걸음에 집중할 것, 위태로울 때는 도움을 물리치지 말 것. 그래야 탈이 나지 않는다고 산이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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