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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Nov 28. 2021

배움의 소용

허영만의 만화 <꼴>은 유명한 관상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가 관상가를 찾은 이유는 단 하나, 새로운 작품으로 관상에 대한 이야기를 그려볼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관상가는 그에게 문턱을 넘어서는 데만도 최소 3년이 걸린다고 말한다. 그 말에 허영만은 그만 뜨악해져서 발길을 돌리는데... 그때, 되돌아나가는 허영만의 뒷덜미에 대고 관상가가 던지는 말.  


"아무것도 안 해도 3년은 그냥 가."


<꼴>에서 이 말을 접한 후, 배우는 일에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할 때면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즐겨 '3년은 그냥 가'라는 말을 던졌다. 희한한 일은 이 말을 들은 대개의 이들은 배움에 쉬이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을 수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쓸데없어서, 너무 늦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로 배움을 시작하지 않았던 이들이 이 말에 힘입어 배우고 싶은 일에 선뜻 발을 들였다.


어제, 그 말이 선물로 돌아왔다. 다사다난한 가정사 탓에 늘 우울감을 안고 살던 이에게서 그림 한 점을 선물받은 것이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대화를 나누던 중에 좋아하는 그림으로 에드워드 호퍼의 <바다 옆 방>을 언급했었는데 흘려듣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니에게 해준 거라곤 '3년은 그냥 가'라는 말뿐이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호퍼의 그림으로 내게 돌아왔다.


이십 대에는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배운다면 그것은 활용이 가능해야 하고 활용된 배움은 사회에 유익하게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환원되지 못하는 배움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아이를 낳아 기르며 이 생각은 바뀌었다. 배움이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인간은 결코 사회의 쓰임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온전히 자신을 누리기 위해서도 존재한다.  


가까운 지인은 배움의 소용을 계산하며 이것저것 발을 담그기만 하고 끝을 보지 못하는 자신의 이력을 푸념하기도 하지만 사실 무언가에 발을 담그기만 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발이라도 담그지 않았다면 그 세계를 어찌 맛볼 수 있었을까. 직접 겪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는 세계와 직접 맞닥뜨려 겪은 세계에 대한 감흥은 전혀 다르다. 흐르는 계곡물이 아무리 맑고 시원해 보여도 계곡물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 그 시원함은 강물의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다. , 시간 속에서 겪은 다양한 변이들을 켜켜이 쌓아 다양한 지층을 만들 듯 사람 또한 시간 속에서 맞이한 다양한 감흥들을 켜켜이 쌓아 자신만의 무늬를 만든다. 그러므로 무엇에든 발을 담그기만 하더라도 배움의 소용은 충분하다.  


인생은 과정의 즐거움을 켜켜이 쌓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을 나이가 들수록 하게 된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몰입하는 즐거움. 성과에 허덕이지 않고 누리는 즐거움. 그런 즐거움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것만으로도 삶은 풍요로워진다. 혹여, 무슨 소용일까 싶어 배움에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한다면 관상가의 말을 떠올려 보자. 어차피 시간은 아무것도 안 해도 그냥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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