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지윤서 Nov 08. 2021

느린 산책

풍경은 다가들고 두통은 사라지고

예전 같으면 트랙을 10바퀴는 족히 돌았을 시간이다. 아니, 그렇게 돌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간만큼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를 돌고 있다. 똑같은 시간을 다르게 걷는 일. 새롭게 다가온 그 일에 새삼 놀라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둘째를 낳고는 허리 통증에 시달렸다. 특히, 제사가 있어 시댁에 갈 때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일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들과 나들이를 할 때는 멀쩡해서 내색하기가 민망했다. 난생처음 겪는 통증이었지만 스트레스성 통증인가 싶어 별스럽게 생각지 않았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제사를 집으로 옮겨와서도 통증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아직 아이들을 건사할 날이 까마득한데 싶은 생각에 서둘러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디스크가 튀어나와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수술을 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며 운동을 권했다. 몸무게를 줄이고 허리 근육을 강화하면 통증이 현저히 줄 거라고 말했다. 그 길로 헬스장을 찾았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돈 한 푼 쓰기 아까운 전업주부였던 까닭에 1만 원이면 다닐 수 있는 동사무소 헬스장에 등록을 했다.


첫째와 둘째를 유치원에 보내고는 곧장 헬스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운동. 처음 한 달 간은 손이 퉁퉁 부었다. 운동을 하지 않던 몸이라 그렇다는 관리자의 말에 부기를 외면하며 운동을 이어나갔다. 석 달이 지나면서 부기가 빠지고 허리 통증도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한 것이라곤 러닝머신과 실내 자전거를 각각 20분씩 타고 각종 근력 운동기구를 활용해 스트레칭을 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통증은 가라앉고 살은 빠지기 시작했다.


막내의 임신 사실을 알기 전까지 헬스장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하루 80분, 1년 가까운 시간을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그곳에서 보냈다. 덕분에 통증이 말끔히 사라졌고 10kg 가까이 불었던 살도 거의 빠졌다. 막내의 임신으로 이후 더는 헬스장이라는 곳에 발을 들이진 못했지만 운동에 익숙해진 몸은 더 이상 장소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이후 집에서 짬나는 대로 운동을 하게 되었다. 주로 애용하는 운동기구는 실내 자전거. 조금만 몸이 좋지 않다 싶으면 얼른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는다. 강도 높은 30분을 버티고 나면 온몸에 열기가 가득 차고 몸이 한결 가뿐해진다. 이 외에 즐겼던 운동은 트랙 돌기. 이 운동은 집 앞 유수지가 단장을 마친 뒤로 즐기게 되었는데 빠른 걸음으로 트랙을 열 바퀴 도는 데 딱 30분이 걸려 좋았다. 그런데 코로나가 심해지며 뜸해지고 말았다.     


그렇게 발길을 접었던 유수지로 다시 나서기 시작했다. 잦아진 두통 때문이다. 일 년 중 10월에서 3월까지는 장을 보는 일마저 온라인으로 대체해야 할 만큼 일감이 밀려드는 시기이다. 외주자인 탓에 일정을 마음대로 조정하기가 쉽지 않아 이맘 때면 자발적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 때문인지 종종 두통이 일곤 했다.  

올해 띄엄띄엄 찾아들던 두통은 지난달부터 부쩍 심해졌다. 그러다 2주 전부터는 딱따구리가 쪼듯 찾아드는 두통이 진통제를 먹고 잠을 청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병원을 가야 하나 갈등하던 차에 큰아이가 실내에만 있어 그럴 수 있다며 산책을 권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젊지 않은 나이. 몸을 혹사하면 혹사한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에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그렇게 시작한 30분 동안의 산책. 머리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는데 매일매일 바뀌는 다양한 풍경에 이내 느릿느릿한 걸음을 즐기게 되었다. 운동이 산책으로 바뀐 것이다. 


계단 아래 집을 지키는 거미, 단풍으로 물드는 나뭇잎,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는 넝쿨 잎, 이슬 맺힌 들풀 잎, 탈곡기에 날아드는 볍씨, 피다만 장미꽃 봉오리,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노부부, 유모차를 끄는 한 무리의 가족들, 농구공을 튀기는 청년들, 담장을 수리하는 인부들, 널브러진 휴지를 주워 담는 청소원, 비눗방울을 터트리며 천진하게 웃는 아이들, 휠체어에 몸을 싣고 해바라기를 즐기는 장애인, 캡을 쓰고 부지런히 트랙을 도는 아가씨...


산책을 할 때마다 무시로 다가드는 풍경들이다. 하루도 똑같은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 유수지에서 이어폰을 타고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올 때면 종종 이승이 천국이 아닐까 싶을 만큼 느린 산책길은 그렇게 황홀하다.




타박타박 발을 내딛고, 찬찬히 풍경을 담으며 길을 걷는다. 느린 걸음으로 30분, 그 단순한 행위를 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물러나는 신기한 경험을 이 가을 만끽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영원한 루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