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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Feb 14. 2023

'부모'라는 자격증

인천 송도로 호캉스를 떠난 막내가 사진을 보내왔다. 문보트를 탔다는데 정말 보트가 달처럼 생겼다.


첫째나 둘째는 집을 떠나도 그리 염려가 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막내는 집을 떠나면 걱정이 된다. 그 걱정을 떨치지 못하고 저녁이 되기도 전에 톡을 넣고 말았다. 재미있게 놀고 있니? 숙소는 좋으냐?는 물음에 막내는 "지구밖을 돌아다니고 있어용"하며 애교 어린 답을 보내왔다. 그러고는 해가 저물고 나서 "문보트 탔당"하며 가족톡에 사진을 한 장 올렸다.


막내는 자신에게만 걱정이 많은 엄마를 늘 불만스러워했다. 엄마 때문에 자신이 아직도 제 나이보다 어린 티가 난다면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그런 것 같다고 혼자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막내는 여전히 중학생 같다고... 아마도 초중 시절을 모두 껌딱지처럼 붙어 다녀서 그런지도 모르겠다(어쩌면 막내가 아니라 내가 껌딱지였는지도^^;;). 이래서 큰아이가 "나 때는 걱정도 않더니!"라며 서운함을 내색하나 보다.


막내는 지난해 휴학을 하고 생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마치 직장인처럼 아침 8시에 집을 나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리도 하고 싶어 하던 영화관 아르바이트라 그리 열심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나름의 계획이 있어서였다는 걸 지난 연말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학교를 통해 외국에 나가려던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스스로 해외로 나갈 계획을 세운 것이다. 6개월간 허투루 돈 한 푼 쓰지 않고 차곡차곡 경비를 모은 막내는 갈 곳과 함께 계획서를 내밀며 다녀오겠다 말했다. 교환학생 같은 안전한 루트가 아니고는 쉽게 허락을 할 리 없는 부모를 설득하기 위한 나름의 묘책이었다. 막내의 뜻밖의 기세에 남편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하지만 큰아이 때처럼 못마땅해하는 기색 없이 "필요한 건 뭐든지 얘기해!"라며 호기를 부렸다. 


남편도 나도 한때 꽤 괜찮은 부모라고 자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의 기준이 자신들의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우리네 부모에  비하면 너무 괜찮은 부모였다. 경제력도 좋고, 지적 수준도 높고, 도덕적이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강요하는 법도 없고, 아이들과 여행도 많이 다니고... 그런 생각 때문이었는지 남편은 종종 취중에 '너네가 얼마나 좋은 여건에서 자라고 있는지 아느냐'는 말을 내뱉곤 했다. 자신의 고생과 애정을 자식들이 몰라주는 것 같아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던 큰아이가 어느 날 남편에게 말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자신들에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그런 환경을 알 수 없는 자신들에게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겪어보지 않은 상황은 알 수 없는 법이다. 아무리 자세히 설명한다 한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그 상황을 오롯이 느끼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은 그래서 외로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내가 될 수 없으므로. 어쩌면 우리 부부의 잘못은 우리보다 더 나은 부모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데 있는지도 몰랐다. 자식에 대해서는 아래를 보고, 부모에 대해서는 위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는지도 몰랐다. 이후 남편은 다시는 '너네가 얼마나 좋은 여건에서...' 따위의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큰아이 덕분에 '부모'라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게 되었다. 부모라는 자리는 자식에게 목숨을 주었다는 이유로 거저 획득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부모'라는 두 글자는 부모 스스로 발행하는 자격증이 아니라 자식이 수여할 때에야 비로소 받아 들 수 있는 자격증과도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아이들이 우리에게 '부모'라는 자격증을 주기나 한 건가 덜컥 겁이 났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부모'로서의 자부심이 폭삭 쪼그라들었다. 그제야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이 아니라 아이들에 대한 기특함이 눈에 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얼마나 무탈하고 늠름하게 자라기 위해 애를 쓰는지도 알아채게 되었다.   


6개월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끝낸 기념으로 막내는 호캉스를 계획했다. 코로나로 캠퍼스의 낭만도, 기대 많았던 성인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막내도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이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해 남편은 환갑에, 나는 쉰여덟에 접어들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이나 30년의 세월을 함께 지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연인으로 만났지만 이제는 연인이라기보다는 동지에 가깝다. 아마도 부모로서의 삶을 함께 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여전히 남편과 나는 아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하고 기다려주고 믿어줄 마음을 먹고 있다. 그것이 어떤 삶의 형태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죽는 날까지 우리 부부가 그 일을 잘 해내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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