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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Mar 10. 2023

후회할 줄 아는 부모가 아름답다

브런치에서 '죄책감 버리기'라는 글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죄책감은 꼭 나쁜 것일까.




유년 시절, 아이들은 똑같이 마룻바닥에 주스를 쏟으며 자랐다. 그때, 첫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한 번은 실수지만 두 번째부터는 너의 잘못이야. 앞으로는 잘 살펴서 실수하지 않도록 해."(말이야 방구야ㅠ) 둘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조심 좀 하지."(ㅠ) 그리고 셋째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바닥 닦을 때가 된 줄 어찌 알고!"


막내에게 저 말을 뱉었던 순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 그런데 첫째 때와는 전혀 다르게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첫째를 쳐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첫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첫째는 막내와는 일곱 살 터울. 3학년에 올라간 첫째는 물을 마시던 컵을 그대로 든 채 엄마를 바라봤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날, 나는 엄청난 후회를 했다. 동생들에게 냉정한 첫째의 태도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유치원 시절부터 선생님들로부터 어떻게 아이가 이리 반듯하냐는 칭찬을 듣는 아이였다. 제 할 일을 어찌나 깔끔하게 해내는지 내게서 어찌 저런 아이가 태어났나 존경스럽기까지 한 아이였다. 하지만 첫째는 동생에게도 친구에게도 냉정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똑똑한 아이가 다정다감하기까지는 어렵지, 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원인이 나의 양육방식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첫째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과를 했다. 너를 그렇게 키워서 미안하다고. 막내를 대하듯 그렇게 너그러운 엄마가 되었어야 했는데 선생님처럼 굴어서 정말 미안하다고. 첫째는 엄마의 눈물을 접하고 당황스러워했다. 왜 그러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과가 아이를 변화시킨 건 분명해 보였다. 반듯하던 태도가 조금씩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늦잠도 자고,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기도 하고 동생들의 실수에도 너그러운 태도를 취했다. 비로소 아이다운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첫째에 대한 죄책감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커서도 아이의 마음이 허기졌을 초등 시절이 문득문득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옷도 나이에 맞게 입히듯 사랑도 나이에 맞게 입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작고 여린 아이에게 나의 불편함을 거침없이 말하며 참을성을 강요했던 엄마였다. 목욕 캡을 불편해하는 아이에게 목욕을 시키는 사람이 힘들겠니, 목욕을 받는 사람이 힘들겠니 소리치며 좀 참으라고 윽박지르는 엄마라니. 사랑에는 '수고'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랑을 온전히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은 아이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이후 나는 아이들에 관한 한 어떠한 일도 '기꺼이'하는 엄마가 되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밑동마저 내어주며 행복해한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사과나무처럼.


나는 죄책감을 좋지 않은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어사전에도 죄책감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라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의인가. 세상에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하물며 자식을 키우며 어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그런 부모다"라고 자신하는 부모가 있다면 자식에게 물어볼 일이다. 정말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는지, 아무 상처도 주지 않았는지. 자식에게 중요한 것은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이다. 나도 부모는 처음이니까, 하고 퉁치는 태도가 아니라 처음이어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하고 사과할 줄 아는 태도이다. 부모에게는 스스로가 아니라 자식을 위로할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를 냈을 때 자식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었잖아."


중요한 건 죄책감을 가지지 않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죄책감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그렇게 발현된 부모의 태도와 마음을 용케도 알아본다. 나는 후회를 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부모가 되면서 아이들에게도 든든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변했듯 아이들도 그런 감정을 통해 좀 더 나은 인간으로 변화해 갈 것이라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후회는 삶의 좋은 거름이다. "이전의 잘못을 깨치고 뉘우침"(표준국어대사전)으로써 태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후회를 하고 죄책감을 지니게 된 덕분에 '집'이라는 장소를 약육강식의 정글에 입문하기 위한 조련장이 아니라 격려와 위로가 가득한 안식처로 만들 수 있었다. 무슨 일에든 기꺼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었다.  





'죄책감 버리기'라는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아직 다 버리지 못한 후회가 밀려드는 밤이다. 내 어머니의 밤도 그러했으리라. 엄마는 아직도 내가 엄마 때문에 화가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그건 그냥 내가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아가 그때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아무것도 엄마 때문이 아니었다고 꼬옥 안아주고 싶다."


나 역시 작가님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후회할 줄 아는 부모는 아름다워요.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작가님이 엄마를 꼬옥 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어머님이 자신을 탓하는 엄마여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내게는 후회할 줄 아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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