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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Jun 29. 2023

남편의 고백

오랜만에 하성란의 소설집 "푸른 수염의 첫 번째 아내"를 꺼내 읽었다. 서사가 분명하고 묘사가 세밀한 작가의 소설은 언제 읽어도 시선을 사로잡는데 이번에는 유난히 '작가의 말'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작가의 말'에 등장한 김득구 선수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김득구무명의 복싱 선수다. 그의 마지막 경기는 '붐붐'이라는 별명을 지닌 챔피언 맨시니와 맞붙은 1982년 WBA 라이트급 타이틀 전이었다. 이 경기에서 김득구 선수는 10라운드까지 우세를 펼쳤지만 이후 맨시니의 역공에 밀려 14라운드에서 쓰러져 끝내 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후 모든 타이틀전은 15라운드에서 12라운드로 축소되었고 한 라운드에서 다운이 세 번이면 자동으로 게임이 중지되는 규칙도 생겼다고 한다.


하성란 작가는 김득구 선수의 이야기를 전하며 몰아의 다른 이름인 '고독'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정작 나는 김득구 선수의 이야기를 읽으며 몇 달 전 산책길에 들었던 남편의 고백이 떠올랐다.


운 것까진 아니지만 슬퍼서 눈물이 났어. 


텃밭을 가꾸느라 시골에 드나들면서도 죽는소리 한 번 내지 않던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의 입에서 '눈물'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남편은 올해 들어 부쩍 육체의 쇠락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폐경을 맞으며 일찌감치 육체의 쇠락을 맛본 터라 '쇠락'이라는 단어가 낯설지는 않았지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던 남편에게서 그 말을 듣자니 쇠락의 기운이 더 짙게 다가왔다. 


남편에게는 평생 '노년'이라는 시간이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 꿋꿋한 성정과 뚝심이 청춘의 시간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남편에게도 어김없이 노년의 시간은 찾아왔다. 똑똑, 몸을 두드리며.


남편의 고백 이후 가끔 나서던 산책을 매일 나서기 시작했다. 외따로 걷던 걸음도 나란히 걷고 잡지 않던 손도 잡게 되었다. 덕분에 무뚝뚝한 관계가 조금 살가워졌다.


부부지간은 '사랑'으로도 '정'으로도 '의리'로도 '측은지심'으로도 사는 참 독특한 관계라는 사실을 남편의 고백으로 깨닫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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