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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Aug 10. 2023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가끔, 예상치 못하게 다가와 깊은 인상을 남기는 책들이 있다. 그런 책들은 주로 기다리느라 머문 장소에서 다가온다.  


얼마 전, 동생의 지인과 식사자리를 가졌다. 식사를 하기로 한 장소는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는데 그날따라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나질 않았다. 손님들의 식사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진 탓 같았다. 식당 주인은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고, 우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자리가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동생의 지인은 서점에서 기다리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동생과 나는 두말없이 지인의 의견에 따랐다. 식당 밖에서 기다리느라 덥기도 했거니와 멀뚱이 서 있느니  서점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자리가 나면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우리는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생의 지인은 서점으로 들어서며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단골인 모양이었다. 서점은 자그마했다. 여섯 평 남짓한 공간에는 책들이 빼곡했다. 출입문을 제외한 벽면에는 천장까지 책이 들어찼고, 중앙에도 매대가 아니라 책장을 놓아 빼곡하게 책을 꽂아 놓았다.


여유 공간 없이 책장이 놓여 있어 딱히 서 있을 공간이 마땅찮았다. 민폐일 것 같아 나갈까 했더니 서점 주인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외려 우리가 불편한 건 아닌가 살피는 내색에 그냥 서점에 머무르기로 했다. 동생의 지인이 서점 주인과 담소를 나누는 동안 동생과 나는 책을 구경했다. 작은 서점이었지만 나름대로 구색을 갖춰놓아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요즘은 건축 관련 책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미술관을 더러 찾아서이기도 하거니와 막내의 관심사가 공간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발견한 『미지의 문』이라는 제목의 책.


책은 '공간과 예술, 그 너머의 생각'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판권을 보니 5년 전에 발행된 책이다. 가격은 18,000원. 목차를 훑으니 '경계, 사물, 차원, 행위, 현상, 장소'라는 6개의 큰 주제 아래 각각 6개씩 작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제목이 다소 모호했지만 처음 보는 사진이 많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산을 하는 동안 서점 주인은 "필요해서 사는 거 맞으시죠?"라는 말을 몇 번이고 물었다. 그 질문이 주인장의 순박함을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


책은 기대대로 흥미로웠다. 발상의 전환이 돋보이는 건축과 예술품이 마음을 즐겁게 했다. 그중 가장 압권은 페터 춤토어의 작품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 15세기에 살았던 클라우스 수도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라는데 짓는 방식이 어찌나 독특한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부 공간에 소나무로 원뿔 모양 거푸집을 만든 다음 거푸집을 태워 채플 내부 벽면에 소나무 줄기의 울퉁불퉁한 흔적과 탄 냄새를 고스란히 남겼다는 건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짜낸 아이디어라는데 모자람이 오히려 기막힌 발상을 하게 한 셈이었다. 112개의 소나무 줄기들이 불타며 하늘을 향해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채플 내부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곳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 것 같았다[페터 춤토르의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 b.. : 네이버블로그 (naver.com) 참조].


책에는 이외에도 벽면 전체가 열리고 닫히는 <스토어프론트>, 새하얀 캔버스를 다양한 장소에 설치하고 2년 동안 방치해 환경이 스스로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의도한 김아타의 <온 네이처>, 7개의 프리캐스트 콘크리트와 철제 구조물로 만든 헤메로스코피움 주택 등 발상의 전환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실려 있었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다양한 관점을 읽고 결국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떠한 관점을 가질 것인가'를 묻는 일,

바로 그것이 이 책이 지향하는 바이다."라고 밝혔는데, 이는 저자가 '명사'보다는 '동사'에 집중하기를 권하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하나의 물체에 부여되는 기능은 언제든지 다른 용도로 바뀔 수 있는 융통성이 존재한다. 빗물이 고이면 새들의 식수대로, 추울 때는 모닥불을 피우는 화로로, 아이들이 조약돌을 넣어 굴리고 놀면 놀이 테이블로 변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이지,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니다. 하나의 사물을 하나의 명사로 가두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머릿속에는 고정된 관념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만약 춤토어가 '거푸집'이라는 명사에 집중해 거푸집은 '떼어내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결코 소나무에 불을 붙이는 발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접하며 또 다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윤기의 수필집 『어른의 학교』에 나오는 '어른의 학교'. 어느 여름, 작가의 가족은 휴대용 가스버너를 싣고 북미대륙 서부를 지나게 되었는데 사막에 접어들어 프로판 가스통을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 위험하다는 경고문을 보게 되었다. 온도가 오르면 가스통이 폭발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걱정에 부모는 가스통을 누군가 주워 쓸 수 있도록 휴게소 나무 그늘에 버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 책을 읽으며 나 또한 그 외에는 별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는데 뒤이어 등장한 작가의 아들이 지나가듯 던진 말에 무릎을 쳤다.  


"아이스박스에는 얼음과 먹거리만 넣는다는 고정관념을 버리세요." 


좋은 책은 늘 고정관념을 흔드는 그 무엇을 담고 있다. 이 책 역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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