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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Nov 10. 2023

놀라운 하루

늦여름, 막내 뱃속이 단단히 탈이 났다. 설사와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더니 '급성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링거를 맞고 약을 지어 집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아랫배 통증은 가라앉았는데 윗배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는 위염 진단을 받았다. 장염과 위염이 함께 오다니!   


부모에게 아이가 아픈 일보다 더 큰 일은 없다. 작은 병에도 부모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한다. 좀체 설사가 가라앉지 않는 막내를 보며 걱정이 앞서 나갔다. 주변에 크론병을 앓는 이가 있어 더 그랬다. 


점점 심란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분노의 포도"를 꺼내 읽었다. 트랙터의 등장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이주의 길에 나선 조드 일가의 여정이 초조해지는 마음을 달래주었다. 100년 전 그들의 상황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너무 사소해서 마음이 담대해졌다. 소설을 읽으며 다시 일상을 튼실하게 이어나갈 힘을 얻었다. 


막내는 닷새째가 되어서야 설사도 멎고 죽이 아닌 밥도 한술 뜨게 되었다. 위염과 장염으로 열흘을 꼬박 앓고 난 막내는 마치 세상을 다 산 노인네처럼 굴었다. 어느 날은 불쑥 걸음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임산부가 왜 팔자로 걷는지 알겠어. 팔자로 걸어야 배가 덜 흔들리거든." 


어느 날은 또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이 왜 노인정에 모여 티브이를 보는지 알겠어. 기운이 없어서 그래."


그 말을 들으니 TV를 잘 보지 않는 막내가 몇 날 며칠을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앓는 동안 평소와 다른 시간을 살았던 막내는 느낀 게 많은 듯 보였다. 건강을 잃은 대신 이해심이 한 뼘 정도 자란 것 같았다. 


일상이 소중해지는 순간이 있다. 바로 건강에 빨간불이 켜질 때다. 몸이 아프면 하루는 1차원적인 일들로 채워진다. 먹고 자고 싸는 일을 잘 해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버거워진다. 그래서 그 일을 잘 처리하던 날들이 얼마나 대단한 날들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하루만큼 놀라운 하루가 없다.  


놀라운 마음으로 오늘을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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