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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Nov 13. 2023

어떤 고백

복도에 나와 있는 오븐기를 보고도 눈치채지 못했다. 고장이 났다는 말만 믿었다. 그런데 고장이 난 것은 타이머 기능뿐이었다.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의아했지만 고칠 수 없어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 녀석을 보면서 외국 브랜드는 쉽게 망가지는군, 생각만 했다. 집들이 선물로 더 좋은 녀석을 선물할 걸, 싶어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원망하기만 했다.


오븐기가 있던 자리에는 에어프라이기가 놓여 있었다. 에어프라이기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에어프라이기의 위력을 만끽하던 중이었으니까. 일상에서 체력 소모를 가장 크게 야기하는 '밥 짓기'라는 세계에서 나를 구원해 준 녀석의 이야기로 그날은 한참 수다를 떨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싶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마도 자기 기분에 취해 참 잘도 떠드는구나 했을 것 같다.


천덕꾸러기처럼 집 밖으로 내쳐진 오븐에 미움의 마음이 깃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서로 간에 전화로 수다를 떠는 관계는 아니지만 서로에게 살뜰하지 않아도 서운해하는 관계는 아니었으므로 오랫동안 눈치를 채지 못했다. 예전과 조금 다르다고 느낀 건 힘든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나를 찾던 사람이 다른 이를 찾았음을 알았을 때였다. 그런데 그때도 미움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다. 그저 내 마음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한때 미워했어요, 고백하기 전까지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사람의 마음에 '미움'이라는 감정이 깃들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했어요'라는 과거형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온 순간 현재형이 되었다. 그 사람에게서 이미 미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말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가 청소기를 밀다가 장을 보다가도 문득문득 그 말은 떠오르곤 했다.


떠오르는 그 말속에서 나는 다시 누군가가 떠올랐다. 내가 뱉은 말을 문득문득 떠올릴 그 누군가가. 내가 그 사람에게 한 말은 '미워했다'가 아니라 '한동안 보지 않으려 했다'였다. 그 사람의 음울함이 버거워 품었던 생각이었다. '한동안 보지 않으려 했다'는 말은 음울함이 사라진 모습을 칭찬하던 끝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말을 뱉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를 '미워했어요'라는 말을 듣고서야 하게 되었다. 나를 의지하고 좋아했던 그 사람에게 나의 말은 얼마나 잔인한 말이었을까.


'한동안 보지 않으려 했다'는 나의 말은 상대방을 잠시 마음에서 내몰았던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은 이기심에서 비롯했다. '미워했어요'라고 고백한 그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덕분에 이기심을 품은 진실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얼마나 고약한지 알게 되었다.


어떤 고백은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도 할 테이지만 어떤 고백은 오히려 아니한 만 못하다는 생각을 두 개의 고백을 떠올리며 하게 되었다. 나빴던 관계를 좋게 풀기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좋지 않았던 감정을 과거에서 현재로 소환할 필요가 있을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면 고백이 아니라 예전보다 더 잘해 주면 될 일이다.  


어떤 고백은 상대에게 먼지를 털 듯 고백해서는 안 된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 스스로의 내면으로 빨아들이고 빨아들여 그 생각을 품었던 사람에게가 아니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먼지뭉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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