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지윤서 Nov 19. 2023

유일무이한 우리

문유석 작가의 신작 『최소한의 선의』를 읽다 놀라운 대목을 만났다. 13세기 중반 영국에서는 자살을 범죄로 규정해 자살한 사람의 가족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다는 것이다. 자살을 범죄에서 제외시킨 것은 1962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야 자살이 범죄의 틀에서 벗어났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1964년까지 앨라배마, 켄터키, 뉴저지, 노스캐롤라이나, 노스다코다, 오클라호마 등 9개 주에서 자살시도를 흉악범죄로 취급해 감옥형에 처했다고 한다. 




살면서 죽음을 생각해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자살' 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 보지 않았을까 싶다. 내게도 죽음을 가장 가까이 두었던 경험이 두 번 있다. 한 번은 복수심에, 한 번은 지겨움에. 


나를 파괴하는 것이 복수라고 생각해 '자살'을 실행에 옮길 뻔했던 때에 나를 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공포였다. 죽기로 작정하고 한강으로 향하던 그때 누군가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한껏 비장한 표정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 상황에 맞닥뜨려서야 나는 내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나는 나를 파괴하는 대신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그 시기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만난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고서는 나와 같은 아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제제는 영특한 아이였다. 아빠를 미워하는 데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뽀루뚜가 아저씨를 제 아빠로 삼아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복수는 파괴가 아니라 지우는 데 있다는 것을. 마음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에게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끝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은 때때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만 하는 일, 해도 해도 아무런 성과를 보이지 않는 무위의 고리에 빠진 듯한 무력감, 거기에 더해 육신의 피로감마저 나날이 쌓이는 상황에서는 '지겨워'라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지겨움은 종종 자살에 대한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둘째를 낳고 종종 그런 충동에 휩싸였다. 당시 복도식 아파트 12층에 살고 있었는데 복도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한 발만 내딛으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나는데'라는 생각을 자주 떠올렸다. 


그 생각의 고리를 끊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였다. 정말 궁금했다. 시시포스는 자신의 형벌을 어떻게 견뎠을까. 카뮈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카뮈의 시시포스는 끊임없이 돌을 올려놓아도 다시 돌이 굴러 떨어지는 상황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돌을 산꼭대기로 올려놓을 때마다 자신에게 다가드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운명은 있지만, 그 운명이 숙명적이고 경멸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는 것이 있을 뿐,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운명은 없는 것이다. 그 외의 것에 대해 인간은 그의 일상생활의 주인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이 그 삶으로 되돌아가는 이 미묘한 순간, 그의 바위로 돌아오는 시지프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기억의 눈길 아래 통일되고, 곧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연결 없는 이 행위의 연속을 바라본다. (중략)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산의 빛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쿵! 마음이 내려앉았다. 하나의 세계. 바위를 밀어 올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에서 마주치는 낱낱의 세계에 집중하는 시시포스. 산꼭대기로 향한 투쟁은 그에게 무익함이 아니었다. 세계를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그동안 무엇을 놓치고 지냈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흘러간 시간들. 아이들도 나도 없이 흘러간 그 무수한 시간들. 그 시간 속에 존재했을 나와 아이들의 세계가 성큼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아이들의 몸짓 하나하나, 눈짓 하나하나가 거대한 세계였다는 사실이 도끼처럼 머리를 내리쳤다. 그제야 나로 인해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 나의 눈길 속에 자라나는 아이들, 나의 운명 속에 봉인된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살아내야 하는 하루가 아니라 발견해야 하는 하루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자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다. 신이 주신 생명이어서가 아니라 생명은 그 어떤 고난에서도 자신만의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희한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삶은 가 보지 않은 길과 같아서 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어떤 풍경과 마주하게 될지 전혀 알 수 없다. '자살'을 떠올릴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인지하지 못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도, 조언도, 질타도 아니다. 공감이다. "이깟 추위에 뭘 그리 움츠려!"라는 질타 대신, "목도리라도 두르지"라는 조언 대신, "춥겠다"는 한마디와 함께 옷깃을 꼭꼭 여며주고 안아주는 공감의 손길이 필요하다. 내게는 책이 그런 손길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시대가 자살을 범죄로 규정하는 시대가 아니라 이해의 범주로 대하는 시대[인터넷에서 자살을 언급하면 곧바로 화면 상단에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글귀와 함께 자살예방상담전화번호(1393)가 뜬다.]여서 퍽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을 지나고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만물에는 겨울 말고도 봄, 여름, 가을이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어떤 고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