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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Nov 23. 2023

남편의 총각김치

지난 일요일, 남편이 알타리를 뽑아왔다. 그런데 알타리가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채 봉지에 담겨 있다. 많지 않은 양임에도 한숨이 나왔다. 다듬을 일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알타리는 손질하기가 여간 번거롭지 않다. 무 표면에 묻은 흙을 물에 불려 박박 문질러야 하고 이파리와 무 경계선은 일일이 칼로 도려내야 한다. 


"이게 일이 얼마나 많은데...."


다음 주에 시골에서 배추를 절이기로 동서와 일정을 맞추어 놓은 터라 알타리도 그때 시골에서 한꺼번에 씻으면 될 텐데 싶은 마음이 올라와 끝내 불평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담아 놓으면 맛있잖아. 이런 거 밖에서는 절대 못 먹어."


남편은 집밥 예찬론자다운 답변을 늘어놓았다.  


예전에는 동서의 진두지휘 아래 시골집에서 배추를 절이고 속을 버무려 김장을 담았다. 하지만 시골집이 빈 집이 되고 난방을 할 수 없게 된 후로는 시골집에서는 배추를 절일 뿐 속은 각자의 집에서 버무리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김치를 담그기에는 얼마나 불편한 공간인지를. 


시골집에는 마당도 있고 수도도 밖에 있어 무슨 일이든 벌이기가 편했다. 농작물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다듬고 씻는데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농작물의 양이 조금이라도 많으면 그걸 펼쳐놓고 다듬고 씻는 일이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감자,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이 아니고는 농작물의 양이 조금이라도 많으면 남편에게 '조금만 가져오지' 불평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일까. 농작물을 뽑아만 오던 남편은 언제부턴가 농작물을 깨끗이 다듬어 오기 시작했다. 다듬지 못하면 흙이라도 최대한 털어서 가져왔다. 그렇게라도 하면 아내의 불평이 잦아들까 싶어서였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이후로 나의 불평은 잦아들었다. 


사실 음식을 만드는 일의 팔 할은 재료를 준비하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장도 속을 만들어 버무리는 일보다 배추를 다듬고 절이고 씻는 일이 더 큰일이다. 절인 배추가 생배추의 서너 배 비싼 가격임에도 주부들이 선뜻 절인 배추를 주문해 김장을 담그는 데에는 배추를 절이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오히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날, 가족톡에 남편의 문자가 올라왔다.  


"엄마는 일이 많으면 총각무 물에 담가 놓으시오. 퇴근하고 내가 가서 다듬을 테니까."


풋, 웃음이 올라왔다. 이미 알타리는 물속에서 제 몸을 불리는 중이었다.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혼자 밥상을 차린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데 남편의 문자를 받고 보니 지금까지 남편 덕분에 잘 다듬어진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기만 하면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외식이나 배달음식에 의존하지 않고 여전히 집밥으로 배를 불릴 수 있는 근력의 팔 할은 남편의 덕이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에게 늘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했으면서도 남편에게는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성정이 찬찬하고 꼼꼼한 남편은 무엇이든 정리하는 걸 좋아한다. 밥을 짓는 일보다 재료를 다듬는 일이 남편에게는 제격인 셈이다. 음식을 만드는 노고에만 정신이 팔려 또 다른 노고를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식탁에 차린 음식은 오롯이 홀로 만든 게 아니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남편은 이미 나와 함께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에야 깨닫는다.


문자를 보고 알타리를 박박 문질러 건져놓았다. 칼질은 남편을 위해 남겨놓기로 했다. 남편의 수고가 총각김치에 맛을 더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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