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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Dec 10. 2023

소심과 대담

'소심'에 대한 정의를 피력한 글[소심함을 극복하는 법 (brunch.co.kr)]을 브런치에서 읽게 되었다.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필자는 '소심'에 대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빌려 이야기했는데 스피노자는 '소심'의 원인을 '당황'에서 찾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미래의 악'을 피하려는 욕망이 '다른 악'에 의해 방해받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당황'이라고 한다.  


몇몇 당황스러웠던 기억을 떠올려 보니 매우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시집의 큰형님은 늘 나를 '당황'시키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나에 대해 갖고 있는 큰형님의 부정적인 평가(다른 악) 때문이었다. 그 부정적인 평가 때문에 나는 형님을 대하는 것에 늘 자신이 없었다. 어떤 행동을 해도 큰형님이 별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미래의 악)이라 지레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시집 첫 제사에서 제삿밥을 휘젓는 바람에 호통을 들었던 일을 시작으로 시골 맏며느리라면 으레 행해야 할 일들을 알지 못했기에 시자부(큰형님의 남편)로부터 급기야 "시집와서 한 일이 뭐 있느냐"는 일침을 들어야 했다. 이후 큰형님은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능한 한 큰형님과는 만남을 피하게 되었고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만나기 전부터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지를 그때 절실하게 실감했다.  


의연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태도는 모든 행동을 소심하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막내형님네에서는 웃으며 해치우는 설거지도 큰형님네에서는 그만두라는 형님의 손짓에 발걸음을 되돌리기 일쑤였고 선물을 장만했다가도 전달하지 못하기 일쑤였다. 큰형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어 주눅이 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이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어졌을까. 어떤 일을 계기로 큰형님의 인식이 변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일은 큰형님을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 아니라 순리를 따라 행한 일이었다. 그런데 큰형님은 그것이 기특했던 모양이었다.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누그러지고 뾰족하던 말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러다 보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스피노자는 '소심함'을 없애기 위해서는 '겸허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겸허함은 '미래의 악'을 먼저 염려하지 않고 다가온다면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 '겸허함'을 지녔을 때 인간은 비로소 대담해지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큰형님을 유독 어려워했던 이유는 큰형님의 평가를 그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는 오만함을 끝내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큰형님의 마음은 큰형님의 것이니 나를 그렇게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겸허함을 내가 지녔더라면 아마도 큰형님과 마주하는 상황에 그토록 주눅이 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겠다. '소심'은 '걱정'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대담'은 '겸허'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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