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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Dec 16. 2023

누군가의 사정을 빚어내는 이들

남편과 오래 인연을 맺어온 어른이 소설가가 되었다. 등단작의 제목은 '오렌지색 물방울무늬 원피스'. 팔순 언저리의 어른이 썼다는 이야기에 별 기대를 않고 작품을 읽었다. 올해 신춘문예에서 칠순을 넘긴 어느 어른의 당선작을 읽고 적잖이 실망한 탓이었다. 


작품은 '치매'에 관한 이야기였다. '치매'라는 진단명을 홀로 받아 들고 지난 삶을 돌아보는 한 여인. 흔한 소재였지만 이야기는 결코 진부하지 않았다. 오래 끓인 곰국을 맛보는 것처럼 문장력과 사유의 깊이가 탄탄했다. 오랫동안 동화작가로 활동해 왔다더니 문자와 함께 살아온 여정은 헛되지 않은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었다. 


작품을 읽다 주인공이 남편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게 되는 대목을 만났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납득이 되어서였다. 


  "저 여자는 복도 많지."

  텔레비전에서 어느 유명인 부부가 악수하며 쿨하게 갈라서는 장면을 보고 있던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후두둑 눈물까지 떨어졌다. 저녁 내내 혼자서 바둑을 두고 있던 남편이 그런 나를 흘낏 보더니, 아무 일 없었던 듯 다시 바둑판으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리 해야지요."

  놀랐다. 너무 놀라서 멍하니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가 평소처럼 '챠라. 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나?' 하면서 볼멘소리를 했다면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댈 수 있는 이유가 열 가지도 넘었다. 그런데 남편이 경상도 사투리 대신 깍듯한 존댓말을 표준어로 발음한 것이다. 존댓말과 표준어는 아직 내가 은행에서 그의 부하 직원이었을 때 잠깐 동안 사용했던 언어다. 약혼식을 치르고 첫 키스를 나누고부터는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남편이 그 언어를 다시 불러온 것이다. 남편이 '합의 이혼'이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재산은 2등분되고, 당신이 궁핍하게 사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구청에 가기로 한 날, 현관 마루에 걸터앉아 구두끈을 매고 있는 남편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편의 정수리 부근에 계란만 한 두피가 보였다. 언제나 풍성한 머리카락을 자랑하던 남편이었는데. 그것은 남편을 만나 겪었던 수많은 감정들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항상 침착하고 자신만만했던 남자. 그 남자에게 반항하고 싶었는데, 이제 보니 늙고 초라한 남자만 보였다. 순간, 이상한 통증이 가슴을 허비었다. 이게 뭐지? 가슴이 알알해서 눈을 껌뻑였다. 사랑인가? 된장찌개처럼 익숙해서 그동안 눈치 채지 못했던 감정.

  "안 갈래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 울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는 남편의 눈에도 물기가 어렸다. 그 후, 나는 '이혼'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도 입술에 올리지 않았다. 남편의 적어진 머리숱이 우리의 긴 결혼생활을 유지시켜 주었다. 


작고한 황현산 선생은 『밤이 선생이다』에서 '사소한 사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글쓰기란 당신의 사소한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소설책을 왜 읽어야 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이 말에 빗대어 답하곤 한다. 누군가의 사정을 이해하기 좋은 창으로 소설만 한 게 없다고. 문자라는 씨실과 사유라는 날실로 누군가의 사정을 빚어내는 사람들. 그들이 소설가라고. 누군가의 사정을 절절하게 빚어내는 소설가들을 만날 때마다 황홀하고 즐겁다. 그들과 한 하늘 아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늦깎이 등단 작가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박완서 작가를 말하곤 한다. 주부라는 타이틀을 달고 마흔에 등단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생을 마감한 박완서 작가. 대개의 예비 주부 작가들은 박완서 작가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마흔도 아니고 여든에 등단한 작가라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많은 문청에게 힘이 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작가의 활발한 작품 활동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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