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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지윤서 Apr 21. 2024

분갈이를 하며

벤자민 나무를 가지치기하며 잘린 가지를 물에 담가 둔 적이 있다. 무슨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 녀석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기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그랬던 것인데 희한하게도 그 가지에서 뿌리가 나왔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뭇가지에서도 뿌리가 난다는 사실을.


뿌리가 제법 돋아났을 때 가지를 자그마한 화분에 옮겨 심었다. 가지는 흙의 양분을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라기를 멈추었다. 뿌리가 뻗어나가기에는 양분도 모자라고 화분도 작아서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자그마한 화분에 담긴 모습이 예뻐서 분갈이를 하지 않고 한동안 그대로 두고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왔다. 잎새가 노랗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가지를 조금 더 큰 화분에 얼른 옮겨 심었다. 다행히도 가지는 또 다른 가지를 뻗으며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


얼마 전, 지인이 이사를 준비하며 빈 화분 몇 개를 건네주었다. 그중 한 화분에 녀석을 옮겨 심었다. 조금 더 큰 화분에서 잘 자라고 있었지만 녀석의 기지개가 하루가 다르게 눈에 보여서였다. 심고 나니 언제 녀석이 이리 컸나 싶을 만큼 늠름한 자태를 뽐냈다. 자그마한 나뭇가지에 불과하던 녀석은 어느새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있었다.


한때 뿌리를 거세당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나는 오십이 되는 날 눈을 감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절히 빌었다. 혼자 힘으로 추하지 않게 살다 아름답게 눈을 감을 수 있는 나이가 오십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면서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다시 빌어야만 했다. 결혼 후의 오십은 막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의 나이였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기 전의 오십과 부모가 되고 난 후의 오십은 전혀 다른 나이였다. 부모로서의 오십은 사랑을 하기에도 모자란 나이였다.     


늠름하게 자란 가지를 큰 화분에 옮겨 심으며 뿌리에 대해 생각했다. 거세당했던 나의 뿌리는 아이들로 인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아이들이 키워놓은 나무였다. 


아이들은 내게 인간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다는 유치환 시인의 말을 절감하게 해 주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 속에서 나는 비로소 튼튼하게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분갈이를 끝내고 나무에 물을 주었다. 흙 위에 깔린 자잘한 돌들 사이로 순식간에 물이 사라졌다. 부피가 커진 화분이 오래 물을 머금을 수 있도록 몇 차례 더 물세례를 퍼부었다. 가지에서 나무로 우뚝 자란 벤자민이 두 팔을 벌리고 흠뻑 젖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나도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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