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모든 걸 기억했다.
내가 예상할 수 없는 다양한 일들이, 아니 예상할 수 없어서 마음속에 울림이 클지도 모른다.
1.
얼마 전 아는 언니, 동생이랑 셋이 자주 가던 김치찌개 집으로 향했다.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곳인데 이유는 기본 반찬이 김과 두부를 주는데 김에 두부를 싸서 김치를 올려 먹으면 이만한 막걸리 안주가 없다. 왠지 김치찌개 집이라고 하니 국물에 밥을 싹싹 비벼 먹어야 할 것 같지만 큼지막하게 썰린 돼지고기와 깔끔한 김치찌개 국물이 정말이지 밥으로 배를 채우기는 아쉬워 밥보단 막걸리를 시킨다.
찌개가 나오기 전부터 막걸리 한잔 두 잔 기울이며 가장 울상이던 언니의 이별 얘기가 시작되었다. 헤어진 후에도 몇번이고 그 남자에게 연락을 했던 언니를 어르고 달래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하다 더이상 긁히고 상처날 곳이 한계가 된건지 아물지 않는 마음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몇번이고 들었던 그 남자친구는 반복해 들어도 정이 안가는 나쁜 남자였지만 언니가 마음속에 품었던 이유는 언니만이 알겠지. 항상 앉는 창가자리에 세트처럼 시키는 장수막걸리와 김치찌개가 함께하니 그간 털어놓지 못한 얘기를 탈탈 털어내며 시간을 보내던 중 잠시 분주한 밖에 눈을 돌렸다. 한시간 가량을 혼이 쏙 빠지도록 얘기하다 잠시 눈을 돌리는 순간 익숙한 옆모습이 빠르게 지나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겠냐 만은 정말 깔끔하게 잘 잊을 수 있도록 안 좋게 헤어진 전전 남자친구였다. 1초 만에 지나간걸 0.50초 동안 잠시 동공이 흔들렸고 긴가민가 혼자 생각하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별생각 없이 얘기를 이어가다 슬슬 김치찌개가 바닦을 보였고 2차를 가기 위해 김치찌개 집을 나왔다. 0.50초간 내 동공을 스치고 간 전전 남자친구는 지나감과 동시에 잊었고 테라스가 넓고 간단히 마실 수 있는 술집에 자리를 옮겼다.
2.
2차에서도 언니의 얘기는 이어졌지만 각자의 근황을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우린 언제 새로운 남자를 만나냐가 화두가 됐다. 슬슬 다들 결혼할 나이가 되니 다들 약간의 불안함을 갖고 있었나보다. 기왕 청승 떠는 김에 대리 만족이나 느끼자고 멜로 영화를 보자하며 2차를 빠르게 정리했다. 언니가 잠시 화장실을 간 사이 계산을 하고 나와 일행과 밖에서 언니를 기다리는데 웬 경찰들과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평소에는 이런 구경을 즐겨하지 않아 쳐다도 안 봤을 텐데 낯익은 옷이 보였다. 아닌척 했지만 0.50초 만에 옷마저 스캔을 했나 보다. 낯익은 옆모습만 지나갔다 생각했는데 옷, 바지 손에는 가방이 없었던 것 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옷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쳐 갔을 정도로 멀리서 봤고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됐는지 터덜터덜 힘 없이 뒤돌아 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술도 마셨겠다 괜한 오지랖인지 경찰들이 왜 왔고 혼자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해결은 된 건지 궁금한 마음에 같이 있던 일행한테 잠시 다녀온다 하고 뛰어서 그를 쫓았다.
아까는 그렇게 쿨하지 지나간다 생각하고 넘겼으면서 그 뒷모습이 무엇을 말하길래 무작정 쫓게 만들었을까. 꽤나 오래 사귄 정 때문인 걸까.
정말 1의 1도 헤어진 후 후회라거나 미련이라거나 하나 없이 이렇게 깔끔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잘 정리했는데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니 이런 걸 다 떠나서 만약 아까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내가 2차가 정리된 시간에 그가 경찰들과 내려오지 않았더라면, 언니가 화장실을 안 가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빨리 나왔더라면, 그가 아무 사건 없이 그냥 혼자 지나갔더라면, 그 뒷모습을 보고도 그냥 지나갔을 텐데.
나는 무슨 생각이였을까.
3.
뛰어가서 팔을 잡았다. 그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란 눈을 했고 뭐냐고 되려 나한테 물었다.
뭐냐고 물어볼 만 하지만 놀란 얼굴에 감추지 못하는 웃음을 봐버렸다.
이내 나는 무슨일을 저질렀길래 경찰이 올 정도냐고 물어봤다. 그는 별 일 아니라고 괜찮며 자기 혼자갈 수 있다고 또 다시 뒤돌아 갔다. 난 먼저 물어봤고 어떠한 대답하기 싫구나 라는 생각에 에 나도 반대 방향으로 뒤돌아 가는 순간 그는 내 팔목을 잡았다.
여기서부터, 영화 같은 일들은 시작이 됐다. 어두운 밤 하늘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테라스에서 술을 마실 때 까지만 해도 선선하게 바람만 불었을 뿐 어두운 밤 하늘에 먹구름인지 뭔지 알길 없던 하늘에서 정말 기가 막힌 시간대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는 닫혀있는 가게 앞 어닝이 길게 늘어진 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꽤나 몇몇 사람들과 피신하게 돼서 우리는 밀착 아닌 밀착을 하게 됐다. 그의 입술은 터져있었고 나는 무슨 일 이냐며 다시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인사불성일 정도로 많이 마신 듯했다.
그 와중에 내가 앞에 있는 게 신기한지 나와 만날 때 꼿꼿하게 조이던 교정기가 사라진 고른 이를 마음껏 드러내며 웃기 시작했다. 얼굴 한번 보고 웃고 내가 하는 별 시덥지 않은 말에 한번 웃고 목소리에 또 한 번 웃고. 그는 내가 물어보는 말은 안들렸고 지금껏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가 너무나 궁금했는지 집요하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계속 이러면 그냥 택시 잡아서 집에 갈 거라 고 으름장을 놔도 종알종알 말하며 혹여 갈까봐 내 손목을 잡고있던 손을 더 단단히 조여왔다.
비가 안 왔더라면 이런 시간도 없이 택시를 태워 바로 보냈겠지만 피신한 어닝 아래 그칠줄 모르는 비를 그치길 기다리며 신기한건지 좋은건지 모를 웃음을 연실 연발하며 한시간 가량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조금씩 비가 그쳐 지나가는 택시에 뛰어 몸을 실었고 2년 만에 본 인사불성 전전 남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는 상황이 생겼다. 택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전에 살던 그 아파트 맞냐고 데려다 주겠다고 물어봤더니 그 남자는 갑자기 나를 꼭 껴안았다. 당황한 나는 왜그러냐고 물어봤다. 아직까지 나에대해 작은 기억이라도 담아줘서 고맙다는 그의 말에 나는 적잖은 당황을 했다.
4.
보다듬과 동시에 났던 익숙한 향. 내가 기숙사 생활을 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바디 로션과 샴푸를 선물해줬고 향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몇 번이고 말했던 그 익숙한 향이 퍼지기 시작했다.
두 번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나에게 당연히 기억할법한 기억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이 나에게는 덤덤하지만 묘하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떨리거나 다시 만나게 된다는 희망 뭐 이런 부분은 아니었고, 그냥 내가 기억했던 따뜻한 사람 그대로의 모습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음에 묘함.
누군가를 무엇으로든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건 그때의 눈동자를 시작으로 진한 향이 퍼지는 게 아닐까. 억지로 누르는 기억이 아닌 서서히 스며드는 기억은 잔잔한 울림으로 깊게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