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둘이서 길을 걷는다. 전봇대를 하나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길엔 한 여고생이 열 걸음 앞서 걷고 있다. 여고생을 보고 친구가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오른손을 등 뒤로 보내더니 화살을 꺼내는 시늉을 한다. 왼손을 쭉 뻗어 여자애를 겨냥하고 화살을 쏜다. 뭐하냐는 물음에 웃으면서 오크를 사냥한다는 친구. 웃어주고 나서 화제가 이어지지 않도록 별다른 코멘트 없이 앞으로 걷는다.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곱씹어 본다.
‘만약’으로 펼쳐보는 이야기.
친구의 화살에 맞은 여고생은 사실 내 동생이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화제를 돌리고 집에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동생이 TV를 보며 과자를 먹고 있다. 밥 먹기 전인데 과자를 왜 먹냐며 괜히 잔소리를 하고 내 방으로 들어간다. 침대에 누워 복잡한 심경을 달래며 상처 받지 않기 위해 합의점을 찾아본다. 동생을 그 시간에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런 고민 안 했을 텐데. 친구의 제안대로 피시방에 갔더라면. 아니, 동생이 뚱뚱하지 않았더라면. 예뻤더라면. 아니, 동생이 없었다면(정말?) 끝없이 이어지는 가정의 끝엔 결국 내가 없었다. 이럴 거면 시발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다 해결되는 거 아니야? 근데 그렇다고 죽고 싶진 않다. 죽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용기가 끓어올랐다. 내가 죽을 순 없으니까, 그런 절박한 각오로 얘기할 수 있겠구나. 내가 살기 위해서 친구에게 하지 말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겠구나.
상상 속에서 눈을 떠 시계를 봤다. 11시 59분이네.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져 지금 바로 친구에게 전활 걸어 오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얘기하고 싶어 졌다. 12시가 되기 전에.
늦기 전에
식기 전에
죽기 전에 얘기하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