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에 눈이 내렸다. 제법 굵었던 눈송이들은 땅속에 스며들지 못하고 채반에 걸러진 불순물처럼 땅 위에 걸려 수북이 쌓였다. 길영은 가족들이 일어났을 때 춥지 않도록 이른 아침부터 장작을 때었다. 온도가 어느 정도 오르자 길영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길영이 침대에 눕자 동생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응, 화장실에 좀.
길영의 몸에서 나무 그을린 냄새가 났다.
거짓말.
미소 지으며 동생을 바라보던 길영은 아무 말없이 다시금 잠에 들었다. 길영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집안에 아무도 없었다. 메시지를 확인했다. 부모님은 조문, 동생의 메시지는 없었지만 이 시간이면 아르바이트였다. 길영은 일어나서 마루로 나가자마자 보일러 온도계를 확인했다. 따뜻했다. 집안의 따뜻함은 온전히 길영의 몫이었다. 그것에 길영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반에 불을 피우기 시작할 때는 휘발유를 사용해 효율적으로 화력을 높였고 중반엔 나무를 층층이 쌓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적당히 타도록 조절했다. 잠들기 전엔 두꺼운 나무를 놓고 바람구멍을 거의 다 막아놔 긴 밤에 천천히 오래도록 타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밤사이 온도가 많이 내려가지 않아 아침에 조금만 신경 쓰면 금세 따뜻해지곤 했다. 땔감을 준비하는 것에서부터 불을 피우고 온도를 조절하는 것. 이 모든 과정에 길영의 손길이 닿았다. 흐뭇한 얼굴로 온도계를 바라보던 길영의 시선이 탁자 위 조그만 탁상달력에 가 닿았다. 겨울이 가고 있다. 입춘도 지났고 절기상 이젠 봄이다. 날이 풀려 보일러를 켤 필요가 없게 되면 길영은 할 일이 없었다. 길영은 창 밖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겨울이 가지 않았으면 하고 길영은 생각했다.
마당에 꽃이 폈다. 4월이었다. 길영은 이름 모를 꽃 앞에 쭈그려 앉아 의식적으로 숨을 천천히 내쉬며 구경했다.
뭐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던 동생이 물었다.
이름이나 지어 줄까 봐.
이름?
응, 이름.
달님이는 온전히 길영의 몫이었다. 행여나 들짐승이 밟고 지나갈까 봐 주변에 나무 울타리를 둘렀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엔 물을 주고 넘치게 오는 날엔 우산을 씌워주었다. 봄 내내 길영의 일은 달님이를 보살피는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달님아’하고 안부를 물었다. 잠들기 전엔 달님이 옆으로 가 꽃잎을 한 번 쓰다듬으며 ‘잘 자’라고 속삭였다. 겨우내 봄의 길영을 걱정하던 부모님은 동생에게 달님이 얘기를 듣곤 안심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달리 동생은 달님이에게 애착을 보이는 길영을 볼 때마다 달님이의 부재를 걱정했다. 곧 여름이었다. 결국 달님은 사라질 터였다. 그게 순리였다.
곧 여름이에요.
여름은 걱정하지 마라.
동생의 걱정을 듣고선 아버지가 말했다.
여름이 되기 전 아버지는 예초기를 하나 구입했다. 이곳에 와서 처음 맞을 여름. 이웃의 말을 빌려 최홍만 만큼이나 자라는 잡초들을 처리하려면 예초기가 필요했다. 조금씩 불어나는 잡초를 앞에 두고 아버지는 길영에게 예초기 사용법을 가르쳤다. 길영은 익히는 게 빨라 금세 자유자재로 예초기를 다뤘다. 길영은 흐뭇한 얼굴로 예초기를 바라봤다. 길영은 여름이 기다려졌다.
여름이 되었다. 과장이겠지 싶어 별다른 대비를 안 한 것이 실수였다. 이곳엔 비가 많이 내렸다. 아주 많이 내렸다. 큰길에 쌓여있던 토사물이 빗물에 마당으로 쓸려 들어왔다. 빗소리에 잠이 깬 길영은 평소와 같이 달님이에게 안부를 물으려 창문을 열었다. 달님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무 울타리가 무너져 있었다. 길영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달님이가 토사물에 밀려 널브러져 있었다. 길영은 달님이를 손에 안고 울었다. 아주 많이 그리고 길게 울었다. 장마가 지나 비가 그치고 가뭄이 찾아와 땅이 메말라가도 길영의 눈물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길영이 걱정된 아버지는 길영이 마음을 딴 곳에 둘 수 있도록 일을 시켰다. 길영은 잡초를 베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베었다. 울분에 찬 얼굴로 거칠게 예초기를 휘둘렀다. 한참을 휘두르다 잡초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길영은 가만히 서서 미동 없이 소리도 없이 흐느껴 울었다. 달님이를 닮은 꽃 한 송이였다. 길영은 잡초를 벨 수 없었다. 아니,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깊은 상실감 속에 길영의 여름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