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불능

by 기묭

입이 근질거리는지 형길은 자꾸 내 눈치를 보며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했다. 나는 대충 감은 잡았지만 묻지 않았다. 형길이 먼저 꺼내기를 기다렸다. 내가 먼저 묻는다면 이 순간의 빛이 바래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얼굴로 휴대폰만 바라봤다. 화장실을 갔던 형길이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을 하고 돌아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슬로우 모션이라고 상상해 본다. 아주 중요한 순간. 형길이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형길이의 입이 클로즈업 된다. 소리는 없다. 어떤 얘기를 주고받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겨져 있다. 분위기와 표정을 보고 심각한 이야기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디테일한 내용은 이 씬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이고 사건이 빠른 전개로 절정을 향해 치달을 것이다. 지금은 위기였다. 형길이가 꺼내려던 것을 미리 눈치채버린 것에 나는 조금 도취되어 있었다. 거기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지금 장면을 카메라의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인데 그만 거기에 집중하느라 형길이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나를 바라보던 형길은 다시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형길이가 꺼낸 이야기가 내가 짐작했던 이야기가 아님에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짐작했던 이야기가 지금 흐르는 이야기보다 더 좋지 않은 결말을 짓게 될 이야기였음에도 나는 내 도취가 식어 버린다는 것을 견딜 수 없다는 이유에서 차라리 세드엔딩을 바랐다. 해피엔딩은 견디기 힘들다. 어중간한 결말은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조명이 꺼지고 카메라가 물러갔다. 나는 조명이 어두운 카페에 앉아 눈을 찌푸리며 형길의 이야기를 듣는다. 형길이는 내 반응이 적절했는지 만족을 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조금 이른 결말. 며칠 뒤 떠나기 전 형길은 나를 찾아왔다. 이번엔 내 짐작이 맞았다. 나는 더없이 도취되어 간다. 형길이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이번에도 소리가 없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커플이 자리를 피한다. 형길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여전히 소리는 없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도취되어 간다. 형길이가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강하게 쥔다. 카메라가 옆에서 두 사람을 한 화면에 담는다. 형길이가 한 숨을 쉬더니 고개를 숙인다. 무어라 한 마디를 남기고 형길은 자리를 떠난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세드엔딩이다. 나는 혼자 남았고 홀로 남겨진 이 상황에 걷잡을 수 없이 도취되어 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