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

by 기묭


나는 어렸을 때 신부님이 되고 싶었다. 물론 신부님은 신부님의 신부를 만날 수 없다는 걸 몰랐을 정도로 어렸을 때 얘기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기억한다. 당시 나는 또래 애들에 비해 조금 조숙한 편이었는데(모두가 솔직했다는 전제 하에) 그래서 그랬는지 또래 애들에 비해 사춘기가 조금 일찍 찾아왔다. 조금 일찍, 2차 성징이 발현하면서 나는 신부라는 꿈을 미래의 내 신부를 위해선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다 어느새 진짜로 잊어버렸다. 어떻게 잊어버렸는지는 잊어버려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고들 하는데 신을 믿는 사람들은 왜 신을 잊은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걸까. 여하튼, 신의 축복 속에 신부라는 꿈을 잊고 지내다 이제와 문뜩 기억이 난 이유는 내가 어느새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든 지금까지도 여자를 만난 적이 없으니 차라리 신부가 되는 게 나을 뻔했나 싶은 생각이 새해를 맞아 달력을 구입하던 중에 문뜩, 문뜩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위의 그 시선. 동정을 동정하는 동정 어린 그 시선을 피할 수 있다면 신부가 되는 것도 괜찮겠다는 그런 생각을 나는 했다. 이것은 언젠가 여행작가를 꿈꿨을 때의 마음과 비슷한데 그 마음인즉슨. 일상 속, 가장 편안한 환경에서도 이방인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여행을 떠나 안이나 밖이나 온전한 이방인이 되어야만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쉬울 것이기 때문에 항상(가능한 자주) 떠돌아다녀야 할 것이고 떠돌면서도 생계를 유지하려면 여행작가를 꿈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을 때의 그 마음이다. 그렇다, 사실은 그냥 도망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게 뭐 어때서 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냥 지금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단지 그것뿐이다. 그래선 안된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내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당면한 문제는 도망친다고 해결되지 않으니 어찌 됐든 지금 여기서 해결해야 한다고. 안다. 그래도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서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에서 도망쳐야 할 때가 오면 진짜로 도망치고 싶어 질 것 같아서. 진짜로 도망치고 싶어 질 때의 나를 나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서 나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는 아직 괜찮은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개소리.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알겠으니까,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도망친다고 말하면서 도망가는 사람을 없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다. 도망치고 싶다고 얘기할 때는 그냥 보듬어 달라는 말이다. 쉬는 시간이니까. 지금은 아직 쉬는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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