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어묵을 크로켓으로 만들어 베이커리화하고, 할아버지 때부터 손수 빚은 막걸리의 제조 과정을 체계화해 최신식 설비로 고른 품질의 맛을 제공한다. 자수 공장 딸은직접개발한패턴에아버지의손을빌려수를놓는다.오랜세월다져온묵직한 내공과 섬세한 기술력에 젊은 세대의 재기 발랄함을 더했다.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자세로 가업을 이끌어가는 도외 3개 브랜드 대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1994년부터 대구에서 자수 공장 ‘장미산업사’를 운영하던 아버지가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하고, 컬러를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딸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네가 디자인을할수있고,나는자수를할수있으니뭐라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아버지의 제안이 흥미로웠던 김진진 대표는 부름에 응답했고, 2008년 키티버니포니(kitty bunny pony)라는 패브릭 브랜드를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 OEM 방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디자인을 개발했고, 쿠션을 비롯해 침구, 커튼, 러그, 파우치 등 다양한 형태로 가공했다. 키티버니포니는 지난 12년간 내부 디자인 스튜디오를 통해 개발한 패턴 디자인만 약 100종이며, 협업으로 만든 패턴을 포함하면 약 150종에 이른다.
2015년 합정동에 메종 키티버니포니를 오픈하면서 아버지가 대표직을 위임했지요.
아버지 밑에서 월급 받는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5년 사옥을 지으면서 법인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아버지는 “앞으로 사업은 젊은 네가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죠. 직접 운영하다 보면 그간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디자인 공부만 해온 터라 경영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대단한 목표를 세우거나 변화를 도모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조금씩 업무를 깨쳤고, 경영을 공부한 남동생이 회사에 합류하면서 체계를 갖추게 됐습니다. 현재 아버지는 대구에서 진진컴퍼니를 운영하고 있어요. 키티버니포니 제작 업무 전반이 이곳에서 이루어지죠. 서울에는 제가 대표직을 맡은 진진인터네셔널 법인이 있고, 상품 디자인 작업과 오프라인 스토어를 운영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일할 때 세운 목표나 원칙이 있었나요?
‘좋은 디자인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치했어요. 유통사를 통하지 않고 제조해서 직접 판매하는 구조를 생각했습니다. 유통사 마진을 상품 가격에서 뺄 수 있으니까요. 당시 저는 상품 디자인, 그래픽디자인, 온라인 스토어 관리 등을 했고, 아버지는 제작 총괄을 맡았습니다. 그전까지 아버지의 일은 OEM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디자인을 적용해 물건을 만드는 것은 아니었죠.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우리만의 디자인을 상품에 접목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키티버니포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디자인입니다. 브랜드 론칭 10주년을 맞은 2018년에는 ‘라이프 인 패턴즈(Life in Patterns)’로 슬로건을 정했습니다. 키티버니포니 패턴이 사람들의 삶에 녹아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좋은 디자인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판매하고 싶다’는 마음이 일치했어요.
유통사를 통하지 않고 제조해서 직접 판매하는 구조를 생각했습니다.
유통사 마진을 상품 가격에서 뺄 수 있으니까요.
브랜드 설립 당시 패브릭 시장 상황은 어땠나요?
당시 대부분의 패브릭 브랜드에서는 도매시장에서 원단을 사서 상품을 제작했어요. 상품 형태도 쿠션이나 침구가 다였죠. 꽃무늬나 레이스가 주를 이루었고, 컬러나 패턴, 그래픽 등을 강조한 상품은 거의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했습니다.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고 컬러에 관심이 많으니 이것을 패브릭에 담아야겠다고 결심했죠. 아버지는 자수 전문이지만, 쿠션이나 침구를 만들어본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재단과 봉제 등을 맡을 수 있는 전국의 공장을 찾아다녔습니다. 동물 모양 쿠션, 동물 모티브를 자수로 놓은 쿠션, 기하학 패턴 쿠션 등 총 11개의 상품으로 시작했죠. 쿠션이 소비자의 호응을 얻으면서 침구, 커튼, 러그, 파우치 등으로 카테고리를 확장했습니다. 특히 자투리 패브릭을 활용해 만든 파우치는 가격대가 저렴하고 크기가 다양해 많은 고객에게 사랑받는 스테디셀러 아이템입니다. 다른 아이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지요.
자체 패브릭 개발 외에도 다른 작가와 협업해 패턴을 개발하고, 키티버니포니의 패턴을 담은 오브제도 만들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협업 과정에서 생기는 시너지가 좋아 부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관습적인 작업에만 몰두하다 보면 흥미가 줄고 아이디어가 고갈되는 경우가 있는데, 다른 작가와 협업하면 스스로 환기되는 느낌이 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키티버니포니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않으려 애써요. 기존 상품과잘어우러지고이질감이들지않도록디자인수정을 거듭하죠. 이런 협업 작업 외에도 별도의 라인을 구축하고 있고요. ‘스튜디오 케이비피’라는 이름으로 패브릭과 전혀 관련 없는, 키티버니포니 스타일의 아름다운 사물을 제작해보고자 만들었습니다. 여러 디자인업체와 협력해 문진과 연필꽂이, 스토리지 등을 제작했죠. 5월에는 ‘케이비피 패브릭스’를 오픈했습니다. 키티버니포니만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원단 가게로, 오리지널 원단 50여 종을 비롯해 단추, 리본, 테이프, 자투리 원단 등 수예 취미 생활을 위한 다양한 부자재를 판매합니다.
일반적인 가업 승계라기보다는 아버지와 대표님의 기술을 더해 새롭고 발전된 결과물을 도출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브랜드명 아래 ‘since 1994’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2008년 아버지의 제안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뿌리는 1994년 창립한 장미산업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도를 되새기면서 아이덴티티와 책임감을 다잡기도 합니다.
가업 계승을 고민하는 청년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가업으로 승계되는 기술력은 아무것도 없이 그냥 시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어느 정도 갖춰진 기반이 있기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 싶지만, 이면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릅니다. ‘다음 세대로 이 일이 이어질 수 있다’는 의식으로 신중히 임해야 해요. 옛것을 젊은 층의 취향이나 흐름에 맞게 리디자인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요. 품질만큼이나 시각적인 만족도가 중요한 시대니까요.
옛것을 젊은 층의 취향이나 흐름에 맞게 리디자인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고요.
품질만큼이나 시각적인 만족도가 중요한 시대니까요.
앞으로 키티버니포니가 선보일 사업은 어떤 것인가요?
올해 여러 계획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진행하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저하던일을묵묵히하는수밖에없는것 같아요. 늦여름쯤 키티버니포니 12년간의 디자인 스토리를 담은 브랜드 북 <KBP Pattern Book>을 출간할 예정입니다. 예전처럼 해외를 쉽게 오가지 못하는 상황이라 장기적으로는 해외 온라인 스토어를 활성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키티버니포니
기획 및 발행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제작 콘텐츠그룹 재주상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