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대가 일궈온 기업을 이어받는 사례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여기, 그 일반적인 범주에서 살짝 벗어난 남다른 승계 이야기를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업과 수산업에서 근면 성실히 일하던 부모님을 따라 동종 업계에서 자신의 감각과 재능을 발휘하거나, 가치와 미감을 전하는 예술에 헌신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작가의 길을 걷고, 부모님의 공장 부지에 재생 건축을 접목해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사례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가업을 승계하고 혁신을 불어넣는 이들을 만나본다.
인정 많고, 물 좋은 신흥리에 김택화미술관이 개관했다. ‘한라산’을 남긴 김택화 화백의 작품을 바탕으로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작가와 작품을 주제로 감각적인 굿즈를 선보인다. 그 중심에 미술관 설립자이자 기획자, 작가 김도마가 있다.
김택화 화백은 제주 그리기를 일생 과업으로 여기며 서울 유학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수하던 추상 대신 사실주의를 반영해 여생을 제주 풍광을 그리는 데 헌신했다. 한라산소주 라벨에 쓰인 작품 ‘한라산’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2000년대 초반 화백이 세상을 떠난 후, 김도마 작가는 10년간의 준비 끝에 화백이 그린 ‘신흥리’의 배경인 조천읍 신흥리에 미술관을 열었다. 화백의 유화 122점, 스케치 3000점이 있고, 작품과 작가를 모티브로 한 아트 상품과 김도마 작가의 업사이클링 가구를 선보인다. 최근에는 비대면 콘텐츠뿐만 아니라 대면을 최소화한 교육 프로그램과 공연도 갖는다. 앞으로 제주 원도심 남성마을에 자리한 화백의 작업실을 미술관 분관으로 공개할 계획이다.
언제부터 미술관을 계획했나요? 신흥리에 연 이유는요.
10년 전이에요. 원래 폐교를 분양받을 계획이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5~6년 전 부지 매입 당시엔 사람들이 찾지 않는, 저평가된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근처에 학교가 있고, 조용하고, 비탈진 지형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김택화 화백이 제주 작품을 많이 그렸지만, 그중 ‘신흥리’는 대표작이기도하고, 1990년대 중반 집중적으로 스케치하던 지역입니다. 신흥리에 대한 김 화백의 애정을 조명하고 싶었습니다.
작가 선배이자 아버지인 김택화 화백을 주제로 공간을 연 계기는요.
애초에 정통한 미술관을 생각했습니다. 김택화 화백은 그럴 만한 작가라고 자부합니다. 공간을 구상하던 초기엔 부자지간에 기인하는 게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했죠. 팔이 안으로 굽어 자의적으로 해석할까 봐요. 전문가로 통하는 많은 작가와 비평가에게 묻고 물으며 확신을 얻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궁금합니다.
매일 그림을 그리는 분이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대든 적이 있어요. 소위 스타 작가가 될 여지가 있는 분이었으니 “아버지는 왜 그걸 안 해요?”라고 우회적으로 물었죠. 외려 저를 간파하곤 웃으면서 “요새 그림이 너무 늘었어” 이렇게 딴소리를 하더군요. 또 “칠십이 넘으면 더 잘 그릴 것 같아”라는 답을 들었어요. 한때는 날 조롱하는 건가, 하는 못난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67세에 돌아가셨는데, 이후론 그 말이 제일 슬프더라고요. 칠십이 넘은 김택화의 그림을 볼 수 없다는 게요.
아버지의 영향으로 미술을 시작한 건가요?
미술은 안 하려고 했어요.(웃음) 어렸을 때 건축가인 작은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고 외국 출장 다니는 모습이 멋져 보였어요.단칸방 같은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그림만 그리는 아버지를 보면서 난 저렇게는 못하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제자이자 저의 은사인 분을 만나서 결국 미대에 진학했습니다. 조소를 전공했고, 지금껏 조각을 하고 있고요.
미술관 가구와 오브제는 김도마 작가의 업사이클링 작품이기도 하죠.
바닷가에서 주운 유목, 초가집을 헐고 얻은 고재, 1980년대 한국에서 생산한 가구, 이 세 가지는 작업 시 지키려고 하는 조건입니다. 원재료만 모아도 40피트 컨테이너에 꽉 차요. 유목이나 고재가 워낙 귀하지만, 1980년대 부서진 가구를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재료를 모으다 보니 쓰레기광이 되었어요. 그렇게 만든 가구에는 스토리를 적어 태그를 달았습니다. 태그마다 살뜰히 찾아 읽는 관람객을 보면 이보다 뿌듯할 수 없어요.
코로나19 이후 전시 관람 형태가 변화하고 있어요. 비대면 콘텐츠,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요?
김 화백의 스케치가 약 3000점이에요. 3초 컷으로 하루 종일 영상을 틀 수 있을 정도죠. 미술관 벽에 슬라이드를 쏘곤 하는데, 벽에 특수 도료를 바르고 창을 내 슬라이드를 재생하면 밖에서 영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미술관 밖에서 즐길 수 있는 방식의 전시를 준비 중입니다. 무료 관람이 가능한 데다 홍보 효과도 있으리라 봅니다.
김택화 화백에 관련된 아카이빙을 진행 중이라고요.
올해 김택화 화백 작품집을 내고 싶습니다. 풀 컬러 유화 전집 제작을 알아보고 있어요. ‘이게 미술책이지’ 싶은 수준의 책을 만들 계획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화백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습니다. 직접 팀을 구성해 영상물을 만들 수도 있고요.
앞으로 김택화미술관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술관 공사할 때부터 생각했던 전시 중 하나가 시화전입니다. 시화전 시리즈를 기획하고 있어요. 저명한 시인의 시에 시각예술 작가들이 시화를 그릴 예정입니다. 그 외에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 기획 전시를 진행할 겁니다. 어느 미술관이나 시도할 수 있지만, 얼마나 진정성 있게 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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