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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커넥트 Dec 31. 2020

실리콘밸리 개발자, Work From 제주

‘오늘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집에서 일하겠습니다. 미팅은 메신저로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약간의 열과 감기 기운이 있다. 전체 팀원에게 짧은 이메일을 보냈다.


아마존닷컴 

민창현 소프트웨어 개발 엔지니어

대부분의 회의는 메신저를 통해 이뤄진다. 자주 보는 얼굴들이라 카메라를 켤 필요는 없다. 부스스하고 피곤한 모습을 굳이 보이고 싶진 않으니까. 메일을 확인하고, 코드를 작성하고, 리뷰하는 등 업무를 하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났다. 더는 회의가 없어 양해를 구하고 조금 일찍 퇴근하기로 했다. 이건 코로나19 사태 이후 모습일까? 이전 모습일까?


미국에서 확진자가 나온 후 많은 테크 기업이 재택근무나 원격 근무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풀어야 할 수많은 문제와 직면했다. 그렇다면 재택근무는 언제까지 지속될까? 사무실에 출근하고 싶은 조직원은 어디서, 어떻게 일해야 할까? 재택근무 시 이들의 복지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 원격 근무 지역의 범위는 어느 정도까지 인정할 수 있을까? 사옥의 유지, 보수를 담당하는 외주 업체의 계약 관계는 어떻게 유지해야 할까? (아마도 경영진을 향한) 숱한 질문 속에서도 새로운 업무 환경에 큰 혼란이 없었던 것은 직장인 대다수가 1~2주에 한 번꼴로 경험했을 WFH(Work from Home, 재택근무)의 연장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익숙한 업무 형태였기에 사무실 옆 건물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공지에 따라 전면 재택근무로 체제를 바꾸어도 업무 환경의 변화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화재에 대비해 탈출 훈련을 몇 번씩 해본 사람들의 마음이었을까? 다만, 최초 한 달이었던 재택근무 기간이 1년을 훌쩍 넘길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2010년 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으로 제주에 있는 회사인 다음커뮤니케이션에 다니게 됐다. 이주와 함께 어느 정도는 리모트 워크를 택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제주를 시작으로, 캐나다 밴쿠버, 미국 시애틀, 그리고 다시 제주로 돌아오는 여정 속에서 한 번도 한 지역에 전체 조직원이 모여 일한 적이 없다. 비디오, 오디오 콘퍼런스 콜은 회사 내에선 일상이었고, 몸담았던 회사는 인프라스트럭처에 많은 투자를 했다. 개인적으로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원격 근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옆 사람과 쉽고 빠르게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배우고 얻는 만족감이 원격으로 진행하는 경우엔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캐나다로 이주한 후 팀원들과 매니저가 각자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면서 보낸 초반 몇 달간은 그야말로 악몽의 시간이었다. 결국 로컬 매니저가 채용되기 전까지, 기존 매니저는 2주에 한 번씩 국경을 건너와야 했지만, 이마저도 팀의 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했다.


본격적으로 원격 근무를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 이사한 2019년부터다. 몇 가지 이유로 미국 이주를 원했고,

매니저의 도움을 받으며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때 캐나다 팀과 반년 정도 원격 근무를 했다. 기억에 남는 부분은 당시 매니저가 원격 근무 형태로 조직원을 관리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는 것과 팀 모두가 서비스를 개발할 때처럼 촘촘히 계획을 세우고, 단계를 나눠 실험했다는 것이다. 결과를 측정하고 개선해가면서 최종적으로 원격 근무를 잘 정착시켜보자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다. 이러한 시도와 실험 끝에 좋지 않은 결과를 얻으면 미국 현지의 다른 팀으로 옮기는 것까지 염두에 두었다. 그 덕에 미국으로 이주하기 한 달 전부터 사무실이 있던 건물이 아닌, 다른 건물에 임시로 자리를 얻어 원격 근무 실험을 시작했다. 1~2주에 한 번씩 사무실에 와서 팀원들과 원격 근무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우리가 이전부터 줄곧 측정 중인 팀 퍼포먼스 지표에 별다른 변화는 없는지 확인했다. 이 과정을 거쳐 원격 근무 전환을 보다 성공리에 달성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모든 과정에서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지원해준 매니저와 팀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시 팬데믹 현실로 돌아와보자. 전면 원격 근무가 시작되며 빠른 시간 안에 관련 정책이 쏟아졌고 발표되었다. 미국 내 메이저 테크 기업이 2021년 중순까지 재택근무를 연장한다고 발표했고, 조직원을 위해 통신비, 모니터, 의자와 기타 장비 구매 지원을 추가했다. 원격 근무 관련 도구를 비롯한 인프라스트럭처 확충이 발 빠르게 이루어졌으며, 일부 회사는 협력 업체에 지속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지역 사회 공헌에 대한 마케팅 기회로 삼기도 했다. 조직원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각종 온라인 미팅과 이벤트를 장려하고, 이를 위한 식사와 간식 비용을 지원했다. 미국에 있으면서 성장하는 회사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지낼 수 있는 것은 재미있고도 귀중한 경험이었다. 많은 기업이 시장 변화 속도에 대한 발 빠른 대응을 핵심 역량 또는 최우선순위로 둔다. 실제로 이를 위해 유연하고 확장성 있는 조직과 정책,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일부 기업에서는 조직원이 원하는 경우 영구적인 재택근무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기업의 유연함과 발 빠른 대응은 일반적 시장 상황뿐만 아니라 팬데믹의 위기에서도 성장의 기회가 된다.


원격 근무 관련 정책 중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정책은 원격 근무를 어느 지역까지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특히 외국인이 많은 미국의 테크 기업 특성상 다양한 이민법과 세법을 고려해야 했고, 많은 기업이 살고 있는 주(state)를 벗어난 근무를 허용하지 않거나 회사의 추가 승인을 받도록 했다. 나의 경우 코로나19 직전 출산휴가를 얻어 한국에 왔고, 미국 집으로 돌아갈 때 나를 제외한 가족은 함께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가족과 지내며 원격 근무를 하길 원했다. 자연스럽게 매니저와 1:1 상담 후 원격 근무 정책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로도 지난한 과정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한국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회사의 조직도에서 나의 근무지는 ‘Virtual Location – Korea’로 표시되어 있다.

오랜 재택근무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올해 4월 팀을 옮긴 후로 현재는 5명 규모의 작은 팀에서 일하고 있는데, 팀원 모두 한국과 미국의 5개 도시에 각각 흩어져서 근무한다. 같은 미국이라 해도 약간이나마 시차가 나는 곳에서 지내는 팀원들이 있어 회의 시간이나 근무 시간에 대해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기존 조직원은 물론이고, 신규 입사자에게는 첫 출근과 원격 근무 모두 꽤 도전적인 일이다. 우리 팀은 나를 제외한 모든 팀장, 팀원이 신규 입사자이고, 입사 첫날부터 원격 근무를 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신규 채용은 계속 이루어지기 때문에 회사의 IT 부서는 전 세계 각지로 업무용 랩톱을 첫 출근 전까지 배송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입사자들의 적응이 더디고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팀원들에게 최대한 업무 시간을 할애해 회사의 업무 방식이나 개발 툴, 문화에 관해 이야기한다. 또 업무 외의 일상이나 서로의 신상에 대해 소통하는 시간을 따로 정해 매일 혹은 매주 만난다. 이 자리에선 각자 거주 지역의 코로나 상황, 날씨, 회사나 팀 문화, 육아 등 다양한 주제 아래 이야기를 나누며 친밀감을 쌓으려고 한다. 코로나 대응에선 단연 한국과 나의 이야기가 다른 팀원의 부러움을 산다.


코로나19 상황 속 원격 근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동료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배려가 필수다. 예를 들면 메신저 응답은 실시간으로 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 대답하지 않고 있다면 아마 가족과 식사 중이거나 잠깐 아이를 돌보고 있을 수 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모처럼 산책을 나갔거나 커피를 즐기고 있을 수도 있고, 인터넷이 갑자기 끊어져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처하는 방법을 매뉴얼화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업무의 진행 상황을 우선 확인하려고 애쓴다. 1:1 미팅, 팀 스탠드업, 팀 주간 미팅, 스프린트 계획과 회고 미팅, 수다와 게임을 위한 해피아워까지, 다양하고 충분한 기회를 통해 본인의 상황을 설명하면 된다. 필요하다면 먼저 팀에 양해를 구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개인의 생활을 인정하는 문화가 바로 이 시기, 요즘 빛을 발하고 있다.


제주에서 다시 원격 근무를 하기 시작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지인들과 온·오프라인으로 소통할 일이 점점 늘고 있다. 함께 일했던 예전의 동료가 주변에 남아 있진 않지만, 그중 몇 명과는 퍽 오랜만에 근황을 주고받았다. 1, 2년 전부터 제주에서 일했다는 1인 개발자, 프리랜서, 또는 원격 근무하는 몇 분을 SNS에서 팔로잉해왔는데, 제주에 온 후론 그들과 오프라인으로 만나거나 온라인상에서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최근에는 교육 콘텐츠나 개발 관련 유튜브 동영상 작업자가 느는 추세인데, 그들에게 자극받아 개인 시간에 시도할 만한 프로젝트를 고민했다. 이미 지난달, 아주 작은 기획으로 지역에서 교육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분의 도움을 받아 50여 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해외 취업 준비 세미나를 온라인으로 열었고, JDC의 제안에 따라 온라인으로 학생들의 포트폴리오 내용을 첨삭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요즘은 갓 16개월 된 아이와 함께 집 근처 공원이나 운동장, 해변 등을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예전에 아이가 생기면 1, 2년은 일을 쉬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원격 근무가 자리 잡고 있지만 힘든 시기임에 분명한 요즘, 일을 쉬지 않고 많은 시간을 제주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감사한 일이다. 혼란한 상황이 정리된 후에는 또 어디로 가서 어떻게 일할지 잘 모르겠다. 그간의 여정은 전혀 계획되지 않은 것이었고,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애쓴 흔적이었다. 복잡하고 긴 시간을 보내는 지금, 함께 견뎌주는 가족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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