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과수원’ 오성훈의 스타트업 일지 ep.4
스타트업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선배이자 동료로서, 꿈을 동력 삼은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진짜 이야기.
겨울이 왔다. 지금껏 <J-Connect> 매거진에 ‘스타트업 일기’를 연재하면서 칼럼 제목 대부분은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이번 제목은 드라마 <스타트업>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해봤다. 액셀러레이터인 크립톤의 양경준 대표님의 말이기도 한데, 듣는 순간 덜컹 하게 된다. 봄, 여름, 가을을 거치면서 꿈의 크기는 많이 작아져 있었다. 내 꿈에도 겨울이 찾아온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라는 대외적인 환경에 원투펀치를, 개인적인 일로 어퍼컷까지 맞아가며 꿈의 크기가 많이 쪼그라졌음을 실감한다. 현실의 벽은 드라마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높다. 쌀쌀한 겨울, 방구석에서 끙끙 앓던 나의 정신이 번쩍 나게 해준 게 있으니 12월에 하는 ‘결산’이렷다. 지난 1년을 결산하며, 당신의과수원 3대 뉴스부터 정리해보기로 한다.
1대 뉴스: 배달의민족 전국별미 입점
‘배민’에 입점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빠른 배송의 배달 음식과 느린 배송의 택배, 정기 배송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배민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의 일환으로, ‘전국별미’라는 직거래 방식의 코너가 생기자, 당신의과수원에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배민을 거의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서울에서 배민을 이용하고, 배민라이더로 활동하는 사람들을 조사했다. 1~2인 가구, 소포장, 1만 원대 등의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당신의과수원은 기존 4인 가족 중심의 대용량 감귤 벌크 포장에서 벗어나 1kg당 9800원 상품(택배비 포함)과 3kg짜리 팩 포장 상품을 출시했다. 반응은 대성공. 초반에 가볍게 1k g을 사던 소비자가 차츰 늘어나더니, 며칠간 두고 먹을 수 있는 3gk이 많이 팔려나갔다. 그리고 이들 소비자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7kg짜리를 선물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2대 뉴스: 당신의과수원 라이언 에디션 출시
올해 상반기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진행한 ‘로컬게더링 2020 제주’를 통해 카카오커머스의 관계자들과 연결돼 이룬 성과다. 카카오프렌즈가 만든 라이언 인형과 당신의과수원 감귤이 들어 있는 한정판 2000세트는 하루 만에 ‘완판’되었다. 캐릭터에 열광하는 팬에게 무엇이 중요하고, 어떻게 확산되는지, ‘팬심’을 읽어볼 수 있었다. 당신의과수원도 언젠가 많은 팬을 확보하는 꿈을 꾼다.
3대 뉴스: 와디즈 사상 과일 역대 최고 펀딩액 달성
‘손노귤’, 이른바 손이 노래져도 귤 까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펀딩이 사고(!)를 쳤다. 작년에 ‘감귤완전정복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5개월 동안 황금향, 온주밀감, 레드향, 한라봉, 천혜향을 차례대로 맛보는 정기 구독 상품을 출시했고, 올해 손노귤 펀딩을 오픈했다. 그리고 이 펀딩은 작년보다 무려 3배 가까이 늘어난 규모로 마감됐다. 손노귤이라는 흥미를 돋우는 이름으로 좀 더 친근하게 스토리를 짜고 기획한 것, 리워드 종류를 작년에는 배송 횟수(3~5회)에 차이를 둬서 가격 편차를 줬다면 올해는 모두 5회 배송이되 중량에 변화를 준 것, 마지막으로 시식단 이벤트를 통해 펀딩 전에 품질을 알 수 있게 한 것 등이 기록적인 펀딩을 가능하게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생각해보면 올해에 이룬 성과는 참 많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낙심했는지 살펴보면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상당했다는 생각이 든다.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주문이 많이 들어오면 기뻐해야 하는데, 포장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늦게까지 고생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쁜 박스를 디자인해 한정판으로 기획했으나, 육지의 박스 공장에서 불이 나면서 턱없이 부족한 물량의 박스가 들어왔다.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기약도 없다. 펀딩과 한정판, 정기 배송 등 발송 일정이 한번에 몰리면서 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큰 수익이 날 것 같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해 지출하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필요한 인력을 충분히 뽑았다고 생각했지만, 늘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새벽 1~2시까지 농장 팀과 끊임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전화로 의사소통한다. 그러는 사이에 낙심은 늘어간다. 지금 이 정도의 문제로도 이렇게 주저하고 낙심하기를 반복하는데,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 스케일업은 과연 가능한 일인지, 주먹구구식으로 하니 더 엉망진창인 것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지울 수가 없다. 그런데 드라마 <스타트업>에 나오는 삼산텍의 대표 서달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바보 같고 엉망진창이라고 말이다.
나에게는 좋은 멘토가 많다. 지원 사업을 하고, 액셀러레이팅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좋은 멘토와 연결된다. 좋은 멘토란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이야기를 해주는 멘토 아닐까? 이번에 만난 귀인은 나에게 ‘방향성이 있어야 지치지 않는다’는 말을 해주었다. 비전을 세우라는 말과 상통할 것 같지만, 내게는 그것과 동일시되어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선택’으로 들렸다. 초기에 품었던 큰 꿈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지, 순간순간 현실의 벽에서 좌절하며 뒤돌아보고 후회할지.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올해부터는 내가 감귤을 수확하고 배송하는 업무를 맡지 않으려고 했다. 실은 대표는 그걸 하면 안 된다고 많은 사람이 조언해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주부터 농장으로 출근하기로 했다. 지원 사업을 깔끔하게 털어버리고, 머리를 비우고, 2021년 계획을 세우기 위해 내게 농장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아직도 딸 귤이 너무나도 많다. 이 글을 읽으며 시간이 되는 분은 애월농장으로 오시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많은 스타트업 대표님 모두의 건투를 빕니다.
오성훈 2017년 도시인을 위한 귤나무 멤버십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신의과수원’을 창립했다. 전 세계 과수원과 사람을 연결하는 플랫폼을 목표로 운영·확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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