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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커넥트 Aug 11. 2021

내추럴 와인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지속가능성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의 와인은 그 역사만큼이나 품질에 대한 기준도, 인식도 매우 높다. 그런데 기존의 와인 생산 과정과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내추럴 와인이 와인 시장에서 점차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전통을 중시하는 프랑스 와인 시장, 특히 변화에 더딘 주류 업계에서 발견한 와인 소비 트렌드의 변화를 소개한다.


글·사진. 김석현 작가(『마케터의 여행법』, 『마케터의 투자법』 저자)


자주 가던 파리의 내추럴 와인숍




지속가능성이 몰고 온 와인 시장의 변화
파리에 거주하는 5년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동네 마트 및 상점가의 가게들을 방문하는 건 나의 일상이자 가장 큰 취미생활이었다. 프랑스어가 서투른 동양인 남성이 동네 채소 가게, 정육점, 이탈리안 식료품점에서 단골 손님 이상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구매 금액과 빈도를 넘어 그들의 식자재와 식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그들 눈에도 엿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내가 빠지지 않고 들렀던 곳은 바로 마트의 와인 코너와 동네 와인숍이다. 프랑스는 와인의 나라니까. 프랑스에서만 소비되는 로컬 생산자들의 숨겨진 여러 와인들을 발견하는 재미는 물론, 다른 나라에서는 값비싼 프랑스 와인을 저렴하게 마시는 특권까지 누릴 수 있는 곳이 파리의 와인숍이다.
처음에는 컨벤셔널 와인, 즉 일반 와인을 마셨다. 정확히는 다른 와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와인 트렌드에도 한 가지 큰 변화가 발생했다. 내추럴 와인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내추럴 와인은 농약과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친화적인 방식으로 재배한 포도로 소량의 산화방지제를 제외한 일체의 식품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인 와인 양조법으로 제조한 와인을 의미한다. 내추럴 와인이 프랑스에 처음 등장한 건 1960년대로, 최근의 일은 아니다. 다만 보수적인 프랑스 와인 산업 특성상 소수의 생산자들만의 문화로만 머물러 있다가 지속가능성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프랑스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내추럴 와인에 담긴 철학과 이야기
나 역시 환경주의자이자 내추럴 와인 애호가인 프랑스 친구의 권유로 내추럴 와인에 입문해 어느 순간 그 매력에 푹 빠졌다. 내추럴 와인에 빠지면서부터 자연히 내추럴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 생산자의 스토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선 내추럴 와인은 대량 생산을 할 수 없기에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고, 각별한 노력이 들어가는 만큼 가격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생산자들이 그만큼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컨벤셔널 와인을 생산하는 와이너리처럼 명예를 얻기도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내추럴 와인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내추럴 와인은 일종의 철학이다. 자연과 공존하면서 토양과 기후의 특성을 잘 살린, 나만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신념이랄까.


자신만의 내추럴 와인을 만들기 위해 파리를 떠난 와인숍 직원


소비를 유도하는 키워드 프레이밍
물론 내추럴 와인은 매력적이지만 그렇다고 소비자 입장에서 내추럴 와인을 무조건 옹호하기 힘든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일단 한국에 돌아와 보니 내추럴 와인은 무척이나 비쌌고(프랑스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싸지만), 맛도 일정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마음에 드는 와인을 찾았다 싶으면 나중에 곧 품절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추럴 와인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소비에 대한 사람들의 기준이 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속가능성’이라는 키워드가 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와인은 필수품이자 매일 먹는 일상품이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물에 큰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와인에 선뜻 큰돈을 지불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름의 가치를 지불하면서까지’ 내추럴 와인을 마시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러한 소비가 더 옳은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추럴 와인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 변화가 눈에 더 들어오는 이유는 환경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주류 산업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더뎠다는 데 있다. 원가와 가격상승은 기본이고 웰빙이라는 코드로 소구하기도 어려운 제품군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은 이 난제를 일종의 지속가능한 문화로 프레이밍(Framing) 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냈다.


새로운 포지션 구축으로 이끈 혁신
그렇다고 ‘지속가능성’을 생산자의 철학과 소비자의 올바른 소비라는 프레임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내추럴 와인의 사례는 지속가능성이 특정 업계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더욱더 의미가 있다. 역사가 긴 프랑스 와인 같은 경우는 와인 생산과 관련된 세세한 규정들이 법으로 정해져 있기에 혁신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었다. 게다가 로버트 파커 주니어와 같은 영향력 있는 와인 평론가들이 오랜 기간 품종 또는 지역별로 좋은 와인의 맛과 향의 기준을 만들어 놨기에 그 기준과 다른 새로운 와인이 높은 평가를 받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내추럴 와인은 이러한 제약들을 극복했다. 꾸준한 협의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관련 법 개정까지 이끌어냈으며, 내추럴 와인을 기존 와인과 전혀 다른 와인으로 소비자들에게 포지셔닝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기존 평가 기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처럼 지속가능한 생산 방식의 도입은 오히려 업계 전체의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환경도 지키고 철학도 고수하고 혁신도 만들어낼 수 있는 셈이니 일석삼조다.


제품 포장을 최소화한 유기농 채소 가게


술과 지속가능성의 결합이 만드는 기회
마지막으로 내추럴 와인은 술과 지속가능성의 결합이 새로운 플레이어의 시장 진입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경우 전통적인 와인 산지와 그렇지 않은 와인 산지 간 와인 가격 차이가 크다. 원산지 효과(Country-of-Origin Effect) 때문이다. 부르고뉴나 보르도 지방의 와인이 다른 프랑스 지방의 와인보다 비싸게 거래되는 이유다. 이런 지역은 오랜 기간 와인을 생산해온 전통이 있기에 새로운 생산자가 자리 잡기가 녹록지 않다. 와인 밭의 가격 또한 비쌀뿐더러 구매 자체가 쉽지 않다. 프랑스의 초기 내추럴 와인 생산자들이 부르고뉴나 보르도가 아닌 알자스, 랑그독 같은 지방에 자리 잡았던 이유다. 컨벤셔널 와인이었다면 전통적인 유명 와인 산지가 아닌 타지역에서 생산되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이 어려웠겠지만, 내추럴 와인은 완전히 새로운 와인이었기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즉 와인과 지속가능성의 결합이라는 내추럴 와인의 등장은 신규 생산자들이 와인 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로 이어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내추럴 와인뿐 아니라 다른 주류 카테고리에서도 지속가능한 혁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내추럴 와인 업계 종사자들에게 내추럴 와인은 일종의 철학이자 신념이기에 그들에게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술은 개혁의 대상이다. 따라서 내추럴 와인을 취급하는 와인숍에서는 내추럴 와인이 아닌 다른 술을 판매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자주 방문하는 동네 내추럴 와인숍 한편에 위스키가 보이기 시작했다. 큰 관심을 두지 않다가 어느 날 찬찬히 살펴보니 브렌느(Brenne)1 , 도멘 데 오뜨 글라스(Domaine des Hautes Glaces)2 등 생소한 브랜드의 위스키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위스키가 단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주인에게 물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생산된 내추럴 위스키라는 존재를 말이다. 그렇다. 와인 업계에서 발생한 혁신이 위스키 업계에서도 발생한 것이다.
영국 외 다른 지역에서 위스키를 생산하고자 하는 시도가 기존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캐나다, 일본이 대표적이다. 사실 위스키는 긴 숙성기간 때문에 거대한 자본이 소요되는 술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진입장벽이 높고 부가 가치 또한 크기에 세계 많은 생산자들이 위스키 양조에 도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위스키 생산에 대한 시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위스키 생산과 지속가능성의 결합이라는 트렌드로 신규 생산자의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생산지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점은 이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스웨덴의 대표 위스키 생산업체 맥미라(Mackmyra)처럼 위스키 양조에 AI를 활용하는 혁신 시도 또한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주도처럼 친환경 지역이라는 브랜드를 지닌 지방에서 시도해본다면?


내추럴 와인과 어울리는 다양한 치즈


라이프스타일 흐름에서 찾는 비즈니스
물론 ‘지속가능성’이 아주 새로운 키워드는 아니다. 배달음식을 시킬 때 가급적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종이컵 대신 자신의 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하고, 환경친화적인 브랜드에 더 많은 애정을 쏟는 소비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환경을 우선시하고 올바른 소비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눈앞의 이득보다 지속가능한 삶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기업은 여기서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내추럴 와인과 위스키를 예로 들긴 했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에서 짚어낼 수 있는 혁신의 실마리는 무궁무진하다. 먹거리일수록 더더욱.


소비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고급 식료품점 라 그랑드 에피스리(La Grande Epicerie)의 와인 코너




1. 프랑스 코냑 지방에서 양조된 위스키. 2012년 판매 시작. 100% 로컬, 유기농, non-GMO 원재료만 사용. 코냑을 양조하는 데 사용한 오크통에 숙성하고 전통적인 코냑 양조 기술 일부를 차용한 것이 특징
2.
 프랑스 알프스 산간 지역에서 양조된 위스키. 2009년 판매 시작. 100% 로컬, 유기농 원재료만 사용. 알프스 지역의 기후, 토양, 재료 등의 특성을 반영하여 전통적인 양조법으로 만든 위스키라는 점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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