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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커넥트 May 31. 2022

담쟁이 걸음 제주 원도심에
다시 사람이 모이고

제주도민 중 MZ라 구분하는 요즘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 나이가 있는 이들에게 ‘시내’는 지금 우리가 원도심이라 부르는 그곳이다. 읍면에서도 특별한 볼일을 보러 갈 때는 “시내에 다녀온다”고 했었다. 성안, 성내의 다른 이름으로 시내를 지칭했던 기억은 그리 멀지 않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지금의 제주 시내는 원도심이라 부르는 공간에 뿌리를 두고 뻗어나간 지역을 아우른다. ‘툭’ 길이 나고 ‘턱’ 건물이 세워지고, 주섬주섬 사람이 모인 것이 아니라 담쟁이덩굴이 뻗어가는 것처럼 빈 곳을 채우며 영역을 넓혔다. 

섬에 인기척이란 것이 처음 느껴졌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람, 삶이란 단어가 심장 박동처럼 뛴다. 분명 예전에 비해서 약해지기는 했지만 태생부터 서사를 만들고 자가호흡을 했던 힘이 빠지는 데는 지금까지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옛’에서 만들어진 길

제주 원도심은 행정구역상 제주시 삼도2동과 일도1동, 건입동까지 포함된다. ‘중앙로’ ‘구제주’ 등으로 불리는 옛 시가지인 원도심 복판에는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관덕정이 있다. 남북 방향은 ‘한짓골’(남문골, 현재 남문로 南門路), 동서 방향으론 ‘칠성골’(현재 칠성로 七星路) 등 크게 두 흐름으로 나눠 읽을 수 있다.

옛 ‘칠성골’을 중심으로 형성된 ‘칠성로’는 여러 면에서 많은 역사와 사연이 깃든 곳이다. 제주지역 경제·문화·사회 중심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칠성로라는 획을 놓고 보자. 고대 탐라국 때 제주 성내 7곳에 북두칠성 형태로 제단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삼을나의 추장이 부족의 번영과 나라의 융성을 기원했던 칠성단이 지금의 이름으로 남았다는 얘기도 있다. ‘탐라국 왕세기’에는 탐라국이 기원전 2337년에 건국했다고 적고 있다. 단군 조선보다 빠른 셈이다.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칠성단 만이 아니라 옛 제주성 안에 자리잡은 뱀신에 관한 칠성본풀이도 있다. 제주에선 뱀을 ‘칠성’(七星)이라고 했다.

뱀신인 칠성은 ‘풍요의 신’으로 이 뱀신을 잘 모시면 재물이 들어와 부자가 된다고 했다. 본풀이 중에는 칠성이 자신을 조상으로 잘 모신 제주성 안의 송대정(宋大靜) 집안도 부자가 되도록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송대정 집안이 있던 골목을 ‘칠성통’이라고 해서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칠성로가 반듯하게 만든 신작로가 아니라 사람 사는 흔적을 따라 구불구불 뱀 형태를 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를 찾는 경우도 있다.

어떤 말이 맞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조선시대 ‘성안’과 가까운 옛적의 중면, 제주읍과 근래의 작은 제주시, 오늘날 특별자치도 광역 행정시까지 그 존재감은 특별하다. 지나간 시절의 역사와 오늘의 시간이 어떠했던가, 그리고 그 다음은 어떠할 것인가를 섬 내 어느 다른 지역 보다도 진솔하게 말해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좌)제주목 관아, (우)원도심의 중심, 관덕정


사람이 모이는 곳

칠성로를 중심으로 한 원도심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산지항과 가까운 이점으로 근대적인 상점들이 들어섰다. 유명 상점들이 거의 칠성로에 자리를 잡으면서 제주에 ‘상권’이란 개념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부터다. 다만 그 시대의 칠성로는 일본 자본에 사로잡혀있었다.

당시 큰 상점들은 일종의 종합상사여서 잡화와 문방구 등을 취급했다. 귀금속·시계류 판매업은 원조격인 미즈하시계점, 모리시계점 등이 자리를 잡은 이래 비슷한 전문점들이 모이면서 이제껏 칠성로의 전통처럼 남아있다.

칠성로 상권의 핵심은 옷가게였다. 1950년대 중반에 양장점 간판이 달린 이후 집안 큰 일은 물론이고 일생에 두 번 없을 일 같은 중요한 시점에 으레 찾는 곳이 된다. 양장점만 있던 것이 아니라 ‘라사’라고 부르는 양복점도 자리를 잡았다. 광복과 6·25 전쟁 후 1955년 무렵에도 칠성로 한양상회(잡화상)를 통해서 공무원들에게 급료 대신 양복천을 배급한 적이 있다고 한다. 

동네 양장점에 가서 옷을 맞춰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 기성복 시장이 열리면서 칠성로의 색깔도 조금씩 달라진다. 의류가 주를 이루던 사정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다른 도시의 상점가와 비슷한 표정을 짓게 됐다. 

1950년대 칠성통은 시대적 상황과 달리 문화가 꽃을 피우는 양면적 모습을 했다. 일제강점기 제주 첫 극장인 ‘창심관’(현 제일은행 자리)이 들어섰고, 1947년 10월 7일 역시 제주에서 처음 ‘다과점’ 허가를 받은 칠성다방이 개업했다. 6·25전쟁 중 학자와 예술 문화인들이 유입되면서 어느 순간 다방은 문화를 나누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다.

제주 문학의 씨앗을 뿌린 계용묵 선생에서부터 강태섭·한병섭·김택화(이상 화가), 홍석표·고영일·부종휴(이상 사진가), 양중해·김종원·강통원·문충성(이상 시인) 등이 제주 문화를 돌담처럼 쌓아 올렸다. 1951년 봄, 제주도로 피란 내려왔다가 아예 눌러앉아 ‘제주 사람’이 된 고 최현식 소설가는 당시를 ‘칠성통 엘레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서울 명동에 비유되는 문화의 중심지, '옛 칠성로'


영원한 것은 없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 후반 칠성로로 이름이 바뀌면서도 대표 상권의 자리는 내주지 않았다. 1970년대 접어들어 아리랑백화점이 입점(1973년)하는 등 칠성로의 번성은 끝이 없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다른 선택지를 내놨다.

6·25전쟁 중 수립된 제주시 도시계획은 전시(戰時) 혹시 모를 상황에 대응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드러냈다. 사람 사는 냄새가 흘렀던 길은 책상 위에서 반듯하게 조각됐다. 관덕정에서 동문로터리까지, 그리고 지금 중앙로라 부르는 도로는 물류와 사람의 이동에 속도를 붙였다. 이후 이어진 도시개발사업을 통해 신산 지구와 서사라 등 새로운 주거지가 형성됐고 상점가도 이동을 시작했다.

원도심에 구멍이 생긴 것은 무게 중심의 이동 때문이었다. 원도심과 주변지역에 집중됐던 제주도청과 교육청, 경찰국 등 각급 기관을 비롯해 대학과 고등학교, 상업 및 금융 관련 시설 등이 하나둘 자리를 옮겼다.

1980년에는 1952년 건립된 제주도청사 자리로 제주시청이 이전했다. ‘시내’라 불리며 행정·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까지 길었던 시간과 노력은 새로 난 길을 따라, 순식간에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동·서광로를 사이에 둔 남북의 온도 차이도 컸다. 

한껏 멋을 내고 LP판을 정리하던 음악다방 DJ도, 주머니 사정이 빤했던 대학생들과 예술인 등 수많은 청춘들이 모이던 주점도, 인터넷 따위는 없어도 그 안에 있는 것만으로 세상에 일어나는 것들을 손금 보듯 알 수 있었던 과거의 모습은 대부분 기억으로만 남았다. 빈 점포가 늘어나며 찾을 이유가 없어지는 공동화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제주 산지천 광장(출처: 더웨이브컴퍼니 김리오 디렉터)


재생이란 이름의 깃발을 올리다

2009년 마지막 구심점이던 제주대병원까지 옮겨가면서 위기감은 고조됐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는 ‘원도심 활성화’라는 깃발을 들게 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문화예술거리 조성 사업’이 시작이다. 2014년부터는 빈 점포 임대사업을 통해 예술가 입주를 유도했다. 2016년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이 시작을 알렸고, 2017년에는 ‘오래된 미래 모관(城內)-옛것을 살려 미래를 일구다’를 비전으로 한 제주시 원도심 도시재생 전략계획이 나왔다. 

덕분에 지금의 칠성로를 따라 걸으면 그 노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주도시재생지원센터와 청년센터, 소통센터 등이 자리를 잡았고, 예술공간 이아나 산지천 갤러리 같은 이름이 익숙해졌다.

제주 북초등학교의 김영수 도서관, 철거 위기 고택을 리모델링한 제주책방, 옛 제주기상청 건물에 혁신창업 지원 및 스타트업 육성이란 쓸모를 입힌 ‘W360’, 원도심과 관련된 사업을 하거나 창업을 준비하는 사업자와 창업자들의 공유공간인 도시재생 디자인공장 등이 들어섰다.


‘잘 할 것’에 심장을 맞추다

다시 원도심에 사람이 모인다. 단순히 북적이는 것이 아니다. 상권의 성격보다는 문화권이라 읽는 것이 훨씬 유연하다. 아직은 헐렁한 큰 신발을 신은 듯 어색하지만, 오히려 때문에 오래 신어도 발이 편할 것 같다는 느낌에 마음이 편하다.

오늘날 원도심의 시간은 한창 도시가 성장하던 때처럼 반듯한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느려도 골목을 더듬어 간다. 원도심에는 아직 어느 시인이 담쟁이에서 봤다는 ‘퉁퉁 부은 발바닥’과 ‘글썽거리는 멍’이 남아있다. 이제서야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인다. 

지역의 강점을 끌어내려는 창업·창작자들이 계속해서 원도심을 택하고 있다. 이들은 지역의 ‘정체성’ ‘역사성’을 그림 속 꽃처럼 쳐다보기만 하지 않는다. 다양한 아이디어로 사람과 지역이 연대하며 생활의 일부로 만들려는 ‘실패’ 혹은 ‘과정’의 사례를 끊임없이 쌓아가고 있다. 과거 아픈 역사 속 힘을 합쳐 일어났던 제주 공동체의 저력을 본다. 이제 ‘잘 될 것’이 아니라 ‘잘 할 것’이 원도심의 새 원동력이다.


제주시 중앙로 로터리의 '과거와 현재'






기획 및 발행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제작 이루다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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