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울 Jan 18. 2022

각자도생, 인생은 솔플이 아니더라구요.

자생하면 될 줄 알았어요. 나만 잘 살면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시는 평범한 가정이었고 나는 꽤나 화목했던 가정의 외동아들이었다. 할머니의 손에서 귀여움을 잔뜩 받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할 즈음. 아버지는 조부모님을 모시고 살겠노라 하며 집을 옮기셨고. 다섯 명, 꽤나 화목했던 우리 집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부모님도 사람이니, 각자의 부분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을 것이라 이해하고 돈과 화목함을 가지지 못한 우리 집도 원망하지 않았다. 열네 살이었다.


  특별히 물건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외동아들로 자라 옷과 간식을 뺏길 염려가 없었기 때문일까. 자연스럽게 뭔갈 바라는 행위가 어색하게 느껴졌고, 내가 원하는 것은 눈치 보지 않고 나 스스로 이루겠다는 다짐은 중학교 때 이미 마쳤던 것 같다. 나 혼자 잘 살면 됐었다. 


  치킨집, 피팅모델, 백화점 수신호, 신발창고, 택배 배송 기억나지도 않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 때 부모로부터의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었고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며 "집안 사정"을 조금씩 깨닫게 되고 어디서나 꿈을 펼칠 수 있을 것 같던 나는 이미 조금씩 천장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꽤나 빠르게 각자도생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삶의 진리라고 생각했다. 부모와 같은 타인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이뤄내는 행위는 추악한 행위라 단정 짓고 치킨을 튀기더라도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나는 계몽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3살, 전공을 살려 무역회사에 입사했다. 남들보다 빠른 취업의 길을 택한 것은 높은 학비를 오랫동안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고, 등록금을 부모로부터 지원받았다는 둥 타인의 말들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나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길을 걸어갔다. 이 사회가 제시해주는 방향대로 살아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여전히 부모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은 내 유일한 자랑이었고 경제적 독립을 이뤘다는 자부심 또한 내 삶의 원동력이었다.


  2019년,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이 연말을 정리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각자도생이 꼽혔고 조명받았다. '그래 내가 바로 저 사자성어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야' 스스로 고양되며 내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여전히 나는 혼자서 달리고 있었고 주변인들은 남아있지 않았다. 스스로 타인의 도움을 받는 사람을 추악하다 여겼었다. 그들을 비난하고 위대하고 대단한 20대 초반의 삶은 나처럼 사는 삶이라 떠벌리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자생하는 사람과 자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이분했다.


  삶을 잘 살았다고 칭찬받고 싶었다. 부모의 도움 없이 힘들었겠다고 위로받고 싶었다. 각자도생 하는 내 삶이 우월해야 했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위안이 되었다.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무언갈 갖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일이 싫었다. 자생과 자립, 독립이라는 말로 위안 삼았지만 사실 자생하기 싫었다. 더 큰 물에서 놀고 싶었고 더 큰 일들을 쉽게 하고 싶었다. 아르바이트 갈 시간에 학원에 다니고 싶었고 친구들과 술 한잔을 더 하고 싶었다. 남들 다 다녀오는 해외여행 한 번을 다녀오지 못했다. 그저 돈으로 젊은 날들의 시간을 살 수 있음에 부러웠고 그래서 나는 더 각자도생이란 말을 믿어야 했다. 나만 잘 살면 됐었다.


 2021년 서울대학교 입학 연설문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대학이 이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곳이라고 해서 홀로 각자도생 하는 곳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 모두 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도 여러분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공동체를 이끈다는 것은 주변에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도울 수 있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리더의 능력입니다."


  나는 리더가 되고 싶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끄는 것을 좋아했다. 팀이 좋아 축구와 농구를 사랑했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다. 각자도생은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니었다. 타인의 도움을 바라거든 자신 역시 남을 도울 줄 알아야 했다. 부끄러웠다.


  2022년을 맞이하며 어리석었던 내 과거의 파편들을 잠시 기록해본다. 팬데믹으로 인해 사회는 점점 더 세분화됐다. 각자도생이란 단어가 틀리지 않은 세상이 왔다. 남을 도우며 생을 찾아보자. 인생 솔플의 한계를 일찍이 느낀 탓일까. 나를 떠난, 내가 떠나보낸 지인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조금 더 주변을 신경 쓰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제주섬은 이동수단이 필요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