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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울 Dec 29. 2022

낭만적이지 않은 제주에서의 크리스마스. (1)

서울에서의 기억과, 제주의 현실은 기분 나쁜 불협화음을 내곤 한다.

너가 귀여웠어도 크리스마스는 서울에서 보내길 잘했단다. / RICOH GR3

채색할 수 없는건, 당신이 그린 크로키 만은 아닐거야.

1.

 
  서울 하늘 아래. 이 자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십여 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낮고 작았던 눈에 비친 겨울 서울의 모습은 보도블록 양 옆으로 쓸린 눈이 얼어있는 모습, 코와 귀가 빨개지고 입술 사이에서는 똑같이 생긴 이들의 탄식 비슷한, 입김을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타향 생활을 시작한 이 곳, 제주가 가장 어색한 것은 날씨였다. 기온이 낮지 않아 춥지 않은 겨울.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자동차 안 생활을 자주 하기에 껴입지 않는 겉옷, 춥지 않기에 내리지 않는 눈, 한라산에 가지 않는 이상 얼지 않는 모든 것.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대부분을 제주에 보내고 서울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기를 갑자기 예매 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 곳은 "겨울 같지 않았다."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은 항상 먼저 나에게 속삭였다. '얼마 남지 않았어.'라고.


   그들의 옷이 두꺼워지고, 장갑을 끼고, 괜스레 거리의 조명은 더 따듯해 보인다. 여름에는 보이지 않던 김(만두집이나, 분식집 따위의)을 모락모락 뿜어내는 청계천 상가들을 지나면 그 끝 광장에는 커다란 트리가 자리하고 청계천에는 조명들이 떠다니곤 했다.


  제주에서는 이 모든 게 실증이었다. 다채롭다는 표현은 제주보다 서울에 더 어울리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따듯함을 챙기기 위해 히트텍을 사러 유니클로에 나갈 일도 없고, 추위를 달래기 위해 어떤 목도리를 메야 할지 고민하는 일도 이 곳엔 없었다. 그리 춥지 않은, 전기 장판 한 장으로 따듯한 밤을 지샐 수 있는 밤을 지나 아침을 맞고 무거운 외투를 손에 든 채 차에 올라탄다. 차 안은 나름 한기가 돌지만 금새 히터 열기로 인해 따듯해진다


  이는 일하는 공간도 마찬가지인데 멋있는 코트를 입고 일하고 싶지만, 손님들의 시선이 달갑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겉옷을 걸치고, 저녁 퇴근길을 나서기 위해 목도리를 매고 장갑을 낀다. 이 모든 일 한 가지 한 가지, 본인의 색을 내기 위해 채색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따듯한 섬, 제주에서 나는 채색될 수 없는, 채색하지 말라고 내면에게 속삭이는 크로키 상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연휴 (거의 모든 이들이 쉬는 날)에 쉬지 못하는 사람은 가게를 여는 사람들. 명절과 연휴에 우리가 밖에서 마시고 먹고 쉴 수 있는 공간을 기꺼이 내어주는 감사한 분들이 있기에 그 가치는 더욱 소중하다. 단지 내가 그 '감사한 분들' 중 한 사람이 될 지는 몰랐지만.


  그 날, 가게에는 사랑하는 연인 혹은 가족이 함께 방문하는 일이 잦았다. 연인과 제주로 여행 온 내 고등학교 서울 친구도 있었고, 제주에서 연을 맺은 사람들이 그날 따라 가게를 많이 찾아줬다.


  '잘 먹었다, 고맙다' 는 말은 가장 많이 들은 날이지만 나 스스로를 도저히 사랑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형형색색으로 발색하며 사랑하는 당신들의 모습에 비해, 나는 선 몇 가닥으로 찍찍 그어진 '크로키' 상태였다.


  극심한 피로감이 찾아왔다. 무채색 계절에 스스로를 색칠할 여유가 없는 겨울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스스로를 질타했다. '서울은 영하 십오도 야.' 라는 친구의 말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뭐라도 걸칠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속에 섞일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시계를 보니 오후 일곱시를 지나고 있었다. 모두에게 열린, 행복한 시간은 단지 다섯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가게 문을 닫고 급히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그 곳에 남겨진 내 가족, 사랑하는 연인, 친구들 이 모두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서울은, 그 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내가 원하는 색으로 나를 칠해줄 것임이 분명했다.


  제주에서 김포로 출발하는 마지막 21시 비행기,  모두에게 황금 같은 이날은 착륙하는 시점부터 단지 두 시간이 채 안 남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비행보다 가슴 떨리며 그 출발을 기다렸다. 새벽에도 빛을 잃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열두시가 넘더라도 서울의 크리스마스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구름 위에서 높은 아파트들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다. 켜진 불빛들, 꼬리의 꼬리를 물고 있는 레드라이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초록색 방수 페인트를 칠해놓은 옥상들. 조금 더 지면에 가까이 내려오자 찬란히 색을 발하는 도시. 내가 색을 잃어가는 동안 이 도시는 그것을 숨기려는 겸손도 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빨간색의 포장마차 테이블, 위의 초록색 소주 병과  푸른 빛을 반사하는 도로 위 아스팔트. 서촌 거리에 펼쳐진 주홍빛 불빛과 모락모락- 그 따듯함을 지체 않고 내뿜는 가게들. 패딩, 재킷, 정장 위로 올라가는 희뿌연 담배연기와 입김 그리고 빨개진 코. 그렇게 서울에서 태어난 나는 서울의 색을 다시금 동경했다. 역설적이지만, 제주는 서울에 비해 '밋밋한 무채색' 임에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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