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을 주면 잃을 것이 생길 것이기에, 주지 않으려 했다.
집 밖을 나서자마자 펼쳐지는 광활하고 깨끗한 바다를 마주하는 곳. 해질녘이면 그것의 뜨거움으로 바다마저 활활 태워버릴듯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던, 줄 지어 손을 흔드는 풍차를 배경삼아 제주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선물해줬던 한경면 용수리. 이 곳에 발을 딛기 전까지 내가 살아가던 지역을 사랑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 곳은 가장 제주스러웠으며, 그 어떤 오션뷰와 어떤 제주의 집을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셋방 살이의 한계는 무엇인가. 정을 주었던 것들을 타의적 압박에 의해 포기해 버려야 할 수도 있는 것들. 약속한 일 년의 시간이 지나고 제주에서 일년을 함께 보낸 부모님은 이미 짐을 챙겨 본래 있던 서울로 돌아간 후의 일이었다. 세 가족이 살았던 집은 눈 앞에 보이는 바다만큼이나 넓었고, 내가 잠을 자던 복층 다락방은 외로운 한 구석, '다락'이라는 명사에서 느껴지는 허무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표출하고 있었다.
함부로 정을 주지 않으렸다. 사람, 집, 물건 혹은 반려동물. 본래 정이라는 것은, 깊으면 깊을 수록 그것이 가져다 줄 어두운 면도 함께 깊어지는 것이었다. '헤어짐, 이별, 잃어버림, 이사' 와 같이 '정'의 의면을 정의하는 단어들. 14년만에 함께 만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써 고립되어버린 섬 제주도. 그리고 잠깐이나마 다시 생을 함께 했던 용수리. 각각의 단어만 떼어놓고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나, 어떤 유대감 안에서 나는 그 모든 것들에 정을 붙였다.
이사를 갈 집은 이미 계약을 끝낸 상태였다. 원만한 전세 계약을 마무리 짓고 실제 이사를 갈 날짜보다 앞서서 확정일자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이 지역과 집에 대한 기억을 혼자 마무리 지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 가족이 함께 살던 집에는 파돗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습기가 차지 않았고 눅눅한 냄새가 집 안에 머물 시간이 없었다. 다락에 혼자 남겨진 그날 밤은, 그저 파돗소리만 밤새 들려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