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정말 바보처럼 사랑했어.’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가 데이브(애덤 리바인)와 헤어진 후 친구와 나눈 말이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이보다 적절한 문장을 떠올릴 자신이 없다. 그녀는 그를 바보천치처럼 사랑했고, 그래서 그와 함께 머나먼 뉴욕 땅까지 밟아가며 조금이나마 그에게 보탬이 되려 했던 것이다. 영화의 제대로 된 이야기가 시작되기도 전 펼쳐진 이야기지만,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그레타는 데이브를 정말 사랑했다. 사랑의 경험이 축적돼 있던 그와 함께 더 큰 억척을 만들어가려던 그녀의 계획은 이젠 관절이 시리지 않을 때나 꺼내보는 썰물 같은 이야기 그뿐이다.
나는 영화의 이야기가 영화스럽지 않은 걸 좋아한다. 등장인물의 심리에 구축되는 이 동질감이 더 이야기에 몰입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앞서 말한 이 불안의 이야기들이 마치 흔한 주변의 이야기 같아서 봄에 핀 꽃처럼 반가웠다.
이상하리만치 우린 적지 않게 사랑을 하고, 진심이나 진실과 관계없이 이별을 겪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번도 넘게 ‘힘내’라며 노력하는 주변인이 있었다. 불행과 위로가 한 시점에 모이는 모호한 인생의 모양이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가 숨결을 갖는다는 지점이 나쁜 기억도 추억이라 맞장구치게끔 하는 셈이다.
그레타는 자신의 낡은 처지를 토닥거림 받고, 또 본의 아니게 위로의 수단으로 찾아간 펍에서 휩쓸린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울 지렛대를 만들었다.
평소 같지 않던 친구에게 만들어준 평범한 장면이 전의가 생겼다니, 마침 그 순간에! 놀라운 우연이다. 그러나 인생 자락의 고비에 놓인 순간 푸념을 걷어 차주는 삶의 속성은 우리 모두가 경험해 보았다.
다 지나간 일이다. 저녁밥을 함께 먹고 고민을 덜어주고, 필요한 건 빌려주던 우리는 이제 없다.
의미를 논하고, 장난을 설득하고, 진지해지고, 그러므로 걱정하고, 조급했던 젊은 날의
사라진 발자국 중 하나에 불과하단 소리다.
“그러게요.” 같은 아무런 의미 없는 담백한 말처럼 ‘너와 내가 함께 더불어 살았다.’라는
찰나의 기억만 충동적으로 번쩍일 뿐이다.
그간 쉽사리 끝맺음 짓지 못했던 건. 종국의 매듭이 원하는 형태가 아니어서였다.
그럼에도 항상 어떤 일의 마지막이 있음은 완전한 매듭이 만들어져서도 아니다.
그 형태가 아무런 신경이 쓰이지 않아서, 이제 더는 그게 상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꼬이기엔 늦어버린 쓸모없는 매듭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던 거지.
Are we all lost stars
그레타는 한때 잘 나가던(잘 나갔던)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을 만났고, 뉴욕을 무대로 눈물 나게 고유한 자신의 앨범을 완성시켜 나간다. 트랙이 대부분 담겼을 땐, 경찰에 쫓기는 일조차 꽤나 재밌어어 하는 게 보인다.
왜 그런 시간이 있지 않은가. 평범히 향유한 하루였지만 염세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날이 있고, 내내 쉽지 않은 가시 돋친 날이었으나 서툴게 웃음이 터지는 순간. 이정표를 정해놓지 않고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 설레는 순간처럼. 걱정도 있지만, 마음이 그을리는 속도보다 맑게 정화되는 기분이 드는 그런 시간.
감격을 발굴하러 떠나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운 일이다.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썼던 일기장을 보면 그때의 나란 녀석은 참 가소롭다.
서른에 이뤄야 할 게 왜 그리도 많은지, 이제 보면 욕심만 그득한 청년이었다.
우연 같은 서울살이 주제에 모든 명사의 수식어는 ‘자가’다. 지금 모습을 꿈에서라도 봤다면 절규하며 잠에서 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변함없이 늙어가고 있는 나라니.
청춘을 물려라도 주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살아간다. 아주 꿋꿋이. 아침은 담배 하나 태우는 일부터 시작한다.
제법 삶이 소소해졌지만 날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넘어지면 주저앉아 있을 게 아니다. 온 힘을 땅바닥에 주고 힘껏 밀어 다시 날 일으켜 세워야지.
함께 늙어가는 나와 추는 춤사위를 본다. 아름답진 않지만 흥겨움이 있다.
불안마저도 이젠 나와 함께라는 마음. 먼 길을 우회하여 걷고 있을 뿐이다.
후반기엔 적당한 풍요로움이 있을 거라 상상해 본다. 조금 늦으면 어떠한가.
나의 다짐까지 꺾지 못한 세 치 혀들쯤이야 가뿐히 무시해 준다.
서른에 안 됐더라면 마흔도 있고 쉰도 있다. 인생은 계속된다.
‘미친 듯이 술에 취해 지하철 기다리다가 뛰어들 셈이었어,
그러다 네 노랠 들은 거야. 맥주 한 잔 할래?’
그녀가 댄을 만나게 된 건 소위 말하는 ‘행운’이라 보는 시선도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나는 이 또한 인생의 곁가지라 해석하는 주의다.
그녀가 데이브를 만났던 건, 음악적 공감대가 없지 않아서고, 댄을 만난 라이브 펍을 간 이유는 음악인이라는 존재감이 자신과 유리하기 어려운 수단이어서며, 스티브가 갑자기 그녀에게 노래를 주문한 건 실력을 익히 알고 있어 라이브 펍 사리에 어울린다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 모든 전제의 가능성만 합해도 ‘행운’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그러기엔 왠지 이상한 것이다. 그럴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아무래도 삶의 원가지에서 작은 가지가 새롭게 피어난 순간이라 밖에 더 할 말이 없다.
우연히 마주친 행운이나, 기회가 지난 선악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운이 피어난 순간이라 믿었다.
그러나, 환희의 순간부터 좌절스러운 나날까지. 모든 게 이어져 있었다. 과거 격동기를 거치며
가장 큰 위로가 건물이 가려주는 햇빛을 등지고 태우던 담배 한 까치였던 때가 있었는데,
암흑에서 세상 위로 건져 올려지고 나서야
그날의 처절함이 있었기에 지금 발붙이는 내 자리가 생겼구나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의 사유는 어떠한 삶의 부침이 있다는 건, 곁가지가 돋아나는 신호라는 점이다.
그리고 때론 가족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해 주는 낯선 사람이 있고,
그래서 웃을 일 없는 그대에게 사소한 희망을 그려주는 순간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여전히 케세라세라의 정신으로 산다. 평생 눈치만 보다 서른이 지나서야 꼬박 나대로 사는 중이다.
모자란 부분은 운이나 운명에 기대 보고 안 되면 받아들이고 순응하면 그만이다.
뭐든 기껍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하다.
어떻게 부대끼다 보니 오늘의 내가 있고, 썩 그 모습이 나쁘지 않다.
나의 지금이 앞으로 또 어떤 관성으로 작용할지 고민하는 게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