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형광등으로 치장된 서른 명 정원의 주점이 아파트 사이에 위치해 있고,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쯤은 누구의 옷장에도 한 벌 정도는 걸려 있을 것만 같다. 평소 성미가 고약한 옆집 할아버지는 우리가 모르는 애달픈 로맨스가 있다. 그래서 때때로 테라스에 앉아 홀로 생각에 잠기신다. 이는 참 이웃으로서 좀처럼 그냥 넘어가기 어려우나 그 시간을 방해했다간 벼락같은 호통이 쏟아진다.
이 모든 건 홍콩을 향한 나의 상상이다. 단 한 번 가본 적 없으니, 그곳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기란 내겐 언제까지나 언감생심이고 무지문맹이다. 그러나 내가 눈을 떼지 않은 건, 홍콩이 그려낸 영화였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홍콩에 대한 상상의 원인은 그것에 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관객의 시선을 홍콩의 풍경으로 몰입시킨다. 어딘가 촌스러운 도심가와
아물아물하게 늘어뜨린 프레임. 매우 어둡고, 누군가는 헐떡이는 씬이 반복된다.
스토리를 이해하는 걸 완수하기 전, 영상미가 뽐내는 치장에 지치는 일도 무리는 아니다.
사실 나는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중시하는 관람객이라 이 영화의 파편적인 구조가 실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영화가 끝난 뒤엔 그 뒷맛을 느끼기 어려워 뜻밖의 실망스러운 심정도 피어올랐다.
아마 이건 평소 고적함, 희열, 벅차오름을 즐기는 영화 감상법이 문제였을 것이다.
자고로 이야기를 편집한 영상물이란 그 심리 형태나 메시지가 손아귀에 들어와야 한다는 게 평소 믿음이다. 영화를 주제거리 삼아 삼삼오오 섞이게 만드는 것까지 제작자의 몫이라 생각해서다.
즉, 나는 대중 영화를 선호해 왔다. 그러나 이 영화의 혼란과 복잡함은 앞서 말한 것과는 간극이 크다.
나의 독해력을 의심하게 했다. 타임라인이 중간쯤 이르러 하나의 옴니버스가 종료됨을 목도한 후부턴
무의식으로 영화를 관람한 셈이다.
한참을 시간을 들여 생각을 곱씹었다. 숨겨진 메타포를 고민하고, 영화 해석을 검색했다. 어느 해석도 틀린 건 없었고, 그 나름대로 납득이 됐지만 거기서 그쳤다. 구체적으로 나를 설득한 코드는 찾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게 된 게 관점을 시켰다.
‘<중경삼림>은 그저 그윽하게 느껴야 한다.’
단순했다. 물음표가 아니고, 음표니 잘 좀 보고 들으란 지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면 난 감당할 만큼만 느끼자 주의다. 감상의 지침에 저항해 그런 태도를 갖추게 된 건데, 영화로 몸을 돌리니 뭐 대단하다고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서려 애쓴거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철저히 내가 원하는 테이크만을 10초씩 건너뛰기 식으로 재감상했다. 이해점을 경계 짓지 않자 청초한 영화의 매력이 스며들었다. 외부의 작용이 없는 무중력의 상태로 영화를 감상하자 뭔지 모를 성스러움이 몸을 휘어잡음을 느꼈다.
한동안 영화로 받지 못한 옅은 후유증이 재발하며 냉랭한 현대인을 자처한 그간의 나를 되돌아봤다. 친한 친구 몇몇에게 영화를 추천하기에 이르자 난 참 경솔했었고, 조금은 예사스러워질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홍콩의 예술은 그 시절에 느낄 수 있는 찬란한 생명력이 있다. 연정을 표현함에 있어 다소 담백하고, 획일화된 인생 위를 걷는 현대인의 감춰진 심정을 끄집어낸다. 이 영화가 현재까지 인생 영화로 손 꼽히는 이유는 아마 그 시절, 시큰했던 누군가의 모습을 반사시키는 부분이 상당히 있음을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차가운 이성과 똑 부러진 지혜보다 솔직함과 노력의 아름다움이 묻어있던 이젠 아득해진
그 시절, 어리석어도 낭만이 있었던 그쯤의 우리 모두는 이 영화 안에 잔해처럼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