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필사로 만나는 나

by 제주미진

아침산책을 위해 반려견과 나선다. 제주 바람이 쑥 하고 다가온다. 나무향이 잔잔히 섞여있다.


밤새 섬을 휘돌던 바람이 폐 속 깊이 스며든다. 나를 지나 나무를 흔든다. 사락사락 나뭇잎이 흔들린다.


사락거리는 나무 소리에 나는 사각거리며 필사하는 순간이 생각난다.


무언가가 나를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는 나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손끝으로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까지 정돈되는 필사가 바람을 붙잡는 일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섬 속 나의 속도에 맞추어 적는다.


제주에서 살다 보면 알게 된다. 섬에서의 시간은 늘 한 박자 느리거나, 혹은 사람보다 먼저 나아가거나,

리듬이 다르다.


필사도 그렇다. 한 자 한 자 적다 보면

어제의 지침도, 오늘의 조급함도, 파도 소리처럼 잔잔히 가라앉는다.


마음이 헝클어지는 날이라면 고요한 창가에 앉아 한 줄만 써보자.

고요함의 속도가, 나의 속도가 된다.


2. 타인의 문장을 베끼며 나의 마음을 듣는다.


곶자왈 숲을 걷다 보면 누군가 먼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게 된다.


필사는 숲길과 닮았다. 타인이 먼저 걸었던 언어의 길 위를 잠시 따라 걷는 일과 닮았다.


이상하게도 그 길 위에서 가장 선명해지는 것은

‘내 마음’이다.


누군가의 문장을 적다 보면 적을수록 나의 결이 드러난다. 발길이 지난 곳의 길모양이 그대로 걸어지는 내 발걸음을 응원하는 듯하다.


3. 필사는 나를 다시 쓰는 일


제주 돌담은 아무렇게나 쌓은 것이 아니다. 허투루 놓인 돌 하나 없이 하나하나 손으로 얹어야 담이 된다.


문장도 그렇다. 남의 문장을 베껴 쓰는 것은

나를 다시 쌓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단단한 어휘 하나, 담담한 표현 하나가 내 일상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는 나만의 담을 만들게 된다. 돌담길이 생기게 된다.


4.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 오늘의 한 줄


제주가 바람으로 말을 건네듯, 글로 당신에게 작은 신호를 보내고 싶다.


필사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유채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조용히 조심스레 시작된다.


가장 좋아하는 책을 떠올려보자. 책을 아무 데나 펼쳐 문장 하나를 종이 위에 옮겨보자.

바로 지금, 여기서.


오늘 만나는 한 줄이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 수도 있고, 혹은 당신에게 새로운 언어를 선물해 줄지도 모른다.


5.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람을 적는다.


필사의 이유 10번째 글까지 오도록 나를 이끈 건 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이었다.


필사를 하면 섬의 공기처럼 마음이 맑아지고,

바람처럼 가벼워진다.


오늘, 섬의 속도를 상상하며 느리게 한 줄을 적어보자. 그 한 줄이 당신의 마음과 일상에

작은 빛을 켜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