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는 나를 해석하고, 나를 읽어주는 일입니다.
나는 나를 먼저 생각하고, 돌보는 법을 잘 모릅니다.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고, 바빠도 타인을 먼저 챙기는 일에 익숙했습니다. 나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필사는 나를 멈춰 세웁니다.
문장을 따라쓰는 동안, 나는 속도를 늦춥니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조급함을 내려 놓습니다. 한 줄, 한 줄 옮겨 적으며 오늘의 나를 생각합니다.
요즘 동화책 필사를 다시 시작하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제 시선을 다듬습니다. 날카롭지는 않은지, 까다롭지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동화책은 매체 자체가 짧은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다 쓸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필사는 성과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완벽을 요구 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쓰지 않아도 된다고, 중간에 멈춰도 된다며 속도를 조절 합니다. 느슨함을 허락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끝까지 끝내려고 했고, 성과를 내려 했던 나를 돌봄을 허락해 봅니다.
나를 재촉하지 않게, 나의 재촉이 아이들을 채근하지 않게 노력을 해봅니다.
하루를 마무리 하면서 가라앉은 기분이나 마무리 되지 않은 일들에 대해 생각을 고릅니다. 내일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정리해봅니다. 분주함을 내려놓고 필사를 하다보면 생각지도 않게 머무는 문장 하나가 있습니다. 잠시 머문 문장을 오래도록 읽어봅니다.
멈춘 순간에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감정을 채워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감정을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필사는 나의 감정을 정확히 알아줍니다.
내가 무엇에 기분이 가라앉고, 무엇에 아파하고 있는지,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문장 사이에서 읽게 됩니다.
필사를 하는 동안 정답이 아닌 해답을 찾아 조용히, 서두르지 않고, 틀려도 괜찮은 시간을 가져봅니다. 손에 쥔 펜이 움직이는 속도를 인지하며 내가 지금 문장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이 문장이 좋네. 아직 이런 마음이 있구나. 나에게 남아 있는 감정이 있어. 이것 때문에 감정이 가라앉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를 바꾸기보다 나를 알아차리고 인정하게 합니다.
이러한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삶은 아주 조금씩 달라집니다. 완벽한 삶은 아니지만 하나씩 알아가는 사이 내가 변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필사는 나를 해석하고, 나를 읽어주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