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나처럼 여전히 여자로 살고 싶다는 고백에 대하여
어제 한라봉 하우스에서 귤을 따던 남편이
내 머리칼을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툭 던진다.
“당신, 그사이 왜 이렇게 흰머리가 늘었어?”
정작 본인 머리는 눈이 내린 듯 하야면서,
내 머리칼에 내려앉은 세월은
어지간히도 안쓰러웠나 보다.
그 투박한 문장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아,
오늘 아침 부랴부랴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염색약의 그 알싸한 냄새를 맡고 있자니,
문득 38년생 우리 엄마의 얼굴이 겹쳐온다.
얼마 전
엄마가 수줍게 피부과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나는 참으로 인색했다.
바쁘다는 핑계,
혹은 그 나이에 무슨 사치냐는 오만한 생각으로
엄마의 설레는 마음을 '순리'라는 말로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엄마, 그 나이에 피부과 다니시는 분은 없대.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살면 안 될까?”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게 미덕이라며 내뱉은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하고 게으른 권유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쉰일곱인 나도 남편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져 당장 미용실로 달려오는데,
여든여덟 엄마라고
어찌 거울 속 당신이 낯설지 않았을까.
엄마도 평생을 고운 것 좋아하고 가꾸고 싶어 했던
'여자'였다는 걸,
자식이라는 이름의 권력으로
나는 왜 그리 무심히 덮어버렸을까.
서울 사는 언니에게 전해 들었다.
엄마가 결국 혼자 피부과를 찾아가
시술을 받으셨다는 소식.
알면서도 처음엔 짐짓 모른 척했다.
내 무관심이 부끄러워 입을 꾹 다물었지만,
마주 앉은 엄마의 정돈된 얼굴을 보니
도저히 입을 닫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엄마, 얼굴이 환해졌네. 너무 예쁘다.”
미안하다는 고백 대신 건넨 그 한마디에,
엄마의 얼굴 위로 아이 같은 수줍음이 번졌다.
나는 지지 않고 덧붙였다.
“이제 선크림도 꼭꼭 많이 발라야 해. 알았지?”
여든여덟의 세월도,
내일 더 고와지고 싶은 여자의 갈망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
까맣게 물든 내 머리칼보다,
엄마의 환해진 얼굴이 더 눈부시게 다가오는 저녁.
엄마, 미안해.
엄마도 나처럼, 여전히 여자로 살고 싶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