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 나는 나의 속옷 서랍을 정리한다

by 제주맘스팜

나는 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며 산다.

내 마지막에 기계의 힘을 빌려

구차하게 삶을 붙들지 않겠다는 서약은

이미 오래전 당연한 숙제를 하듯 마쳐두었다.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내 죽음 준비는

참 유치하고도 요란했다.


그때는 내가 없으면 세상이 무너질 줄 알았다.


내가 먼저 죽으면 이 어린것들은 어쩌나,

신랑이 새장가를 가서 계모라도 들어오면

우리 애들이 구박데기가 되지는 않을까.

밤잠을 설치며 비극 소설을 쓰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제는 혼자 키득키득 웃음이 난다.


참으로 부질없고도 뜨거웠던 걱정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제 앞가림할 만큼 다 컸고,

나 또한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쉰일곱이 되었다.


마흔대의 부고에는

남겨진 이들이 가여워 목이 메었지만,

이제는 갑작스러운 비보에도

"그럴 나이지, 조금만 더 살다 가지" 하며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죽음이 내 삶의 한복판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준비는 요란한 걱정 대신

조용한 서랍 정리로 대신한다.

가끔 죽음이라는 단어가 마음 끝에 걸릴 때면

나는 어김없이 속옷 서랍을 연다.


평소 살림을 반듯하게 가꾸는

부지런한 여자도 못 되면서,

낡고 너덜너덜해진 것들을 골라내고

깨끗한 것들로 채워 넣는 이 일에는

지독할 정도로 마음을 쓴다.


내가 떠난 뒤 누군가 내 뒷자리를 치우다

해진 속옷을 발견하는 일.

그게 왜 이토록 부끄럽고 서글픈지 모르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참 고단하게 살다 갔네" 하는

안쓰러운 동정을 받고 싶지 않다.

대신 "마지막까지 참 정갈하게 제 몸 하나는 건사하고 갔구나" 하는

서늘하고도 단단한 인사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 자신을 귀하게 대접했다는

그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는 나만의 몸짓이다.

내 서랍 안쪽이 깨끗하게 정돈된 만큼,

나의 마지막도 그만큼만 단정하기를 바란다.


떠난 자리에 낡은 흔적을 남겨 동정받고 싶지 않다. 구질구질한 것들을 비우고 서랍을 정갈하게 하는일, 그것이 쉰일곱의 내가 나 자신에게 갖추는

마지막 예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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