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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Dec 03. 2023

사람은 나이 들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

자녀들은 엄마, 아빠의 젊음을 먹고 자란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는 추억을 먹고 산다"라고 흔히들 얘기한다.

이 말에 의하면 추억이 많이 그립고, 옛날 얘기를 많이 하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된다. 

요 근래 몇 달 사이 나를 지배하는 화두다.


얼마 전까지 나는 집에 소장하고 있던 3,000여 장의 사진을 스캔해서 PC에 담아두는 작업을 했다. 

책장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두꺼운 앨범을 꺼냈다. 먼지가 가득이다. 

앨범의 표지를 넘기고 누렇게 변해가는 비닐을 손톱으로 당겼다. 

"지지찍" 비닐이 벗겨지는 소리다.  

사진을 빼내려고 비닐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그런데 사진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앨범 표면에 착 붙어있는 거다. 사진을 담아두었던 오랜 세월의 무게만큼 앨범 속에서 자리를 잡은 거다. 

조심스럽게 달래고 달래서 사진을 당겨본다. 운이 좋으면 슬며시 분리되지만, 어떤 사진은 앨범이나 사진 둘 중 하나가 영광의 상처를 입고야 만다. 사진이 찢기든, 앨범이 찢기든 하는 거다.  

이렇게 나와 우리 가족의 역사가 담긴 10권 남짓에 담겨있던 모든 사진을 뜯어내서 일일이 스캔을 했다.


사진을 앨범에 담아두었더니 말 그대로 소장용이 되어서 쉽게 꺼내서 보기가 어려웠다. 

앨범은 크기나 두께가 보통의 책들과 다르기에 서재나 책장 속 가장 깊은 곳에 보관한다.  

어쩌다 가끔 필요에 의해서 사진을 찾아보면 누렇게 퇴색하는 사진들이 많았다.

 

"인터넷에서 사진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검색해 보면 대부분 스캔해서 파일로 보관하라고 한다.

사진을 스캔해서 전자앨범 형태로 만들어 두는 것이 트렌드인 모양이다. 상업적으로 하는 곳도 많다. 

이렇게 하면 보관도 용이할 뿐만 아니라 접근이나 관리도 쉽다. PC작업을 하다가 쉽게 볼 수 도 있고, USB나 메일을 통해서 가족이나 여러 사람들과 공유도 가능하다. 자녀들이 자라는 과정을 순차적인 파일로 정리를 해서 쉽게 동영상을 만들 수 있다. 


필름카메라 시절에는 사진을 찍는 일이 보통일은 아니었다. 시쳇말로 날을 잡아야 했다. 먼저 카메라가 없는 경우는 어디선가 카메라를 빌어야 했다. 단골 사진관이 있어야 가능했을 정도다. 다음 필름을 구입한다. 보통은 24장, 36장을 찍을 수 있는 필름이다. 

이제는 눈치를 보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필름을 주위에서 얼른 구입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닌 경우 가령 등산을 하는 경우 등은 사진을 계획성 있게 찍어야 한다. 가져간 필름 생각 안 하고 처음부터 마구 사진을 찍었다가는 후반부에 정작 중요한 곳, 사진을 찍어야 할 곳에서는 사진을 못 찍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풍경에 취해서 아님 사진 찍는 장면마다 참석과장이 되어서 얼굴을 내밀었다가는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별도로 사진 인화비용을 지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머니 사정이 빡빡했던 학생시절에는 인화하기 전 사진관에서 필름을 불빛에 비춰 보면서 사진을 뽑을지 말지를 고민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기에 필름 카메라를 주로 사용하던 2000년대 이전의 사진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사진을 찍으면 인화해야만 볼 수 있기에, 사진이 나오는 날만 기다렸고

사진이 나오면 잘된 사진들은 돌려 돌려 보다가 앨범을 사서 곱게 꼽아서 말 그대로 추억으로 보관을 했다. 

그런 세월이 20년 전의 일이 되었다. 



사진 중 압권은 선친의 사회활동을 하면서 남겨두었던 5cm*5cm 크기의 조그만 누런 사진이다. 

사진으로는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된다. 단지 외형으로만 누구 닮다고 구분할 뿐이다.

사진이 어려웠던 시절, 일제강점기 시대 1950년대 사진들이다. 

지금이라도 스캔을 하고 사진을 좀 확대해서 볼 수 있기에 다행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70년대 초 집 앞과 동네어귀에서 찍은 사진은 꾀죄죄한 모습이 어려웠던 그 시절의 모든 것이 그대로 녹아있다. 어쩌다가 찍었던 한 장의 사진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일본에 계시던 외삼촌이 제주에 왔을 때 찍어서 보내준 사진들이다. 인화지가 다르기에 쉽게 구별을 할 수가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당시 보기 힘들던 CANON 카메라를 가지고 있던 덕에 많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주말이면 거의 한라산을 제집 드나들듯이 등산을 하고, 겨울철 눈꽃이 피면 1100 고지에 눈싸움하러 가야 하고, 여름철이면 가끔씩을 계곡이나 바다낚시도 해야 했기에 그 시절 그 모습은 그대로 사진이 담겨있다. 그때는 참 관여할 일도 많았던 것 같다. 이제 사진 속 까까머리와 단발머리가 60대 중반 일 텐데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변해버린 모습이 궁금하다. 이미 고인이 돼버린 친구들도 몇이나 보인다. 



내일모레 12월 8일이면 아내하고 연을 맺은 지도 33년이다. 

89년 5월 22일 처음 만나서 아웅다웅 싸우면서 연애를 했다. 사내연애로 비밀이었기에 당시 흔적일 수 있는 사진은 없다. 모르게 모르게 한다고는 했는데 당시에 사내에도 비밀요원들이 많은 때라 모르겠다. 어떤 첩보가 들어갔는지(?) 당시 아내와 연애를 시작해서 얼마 안 돼서 나는 외곽지(당시에는 사지라고 하는 곳)로 발령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발령에 모두가 놀라는 분위기였는데.... 그런 시절이었다.   


세상을 모르고 세상 속으로 일보 전진하던 결혼식과 설악산 신혼여행 사진도 수두룩하다. 무수히 찍어놓기만 하고 자세히는 보지 못했던 사진들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드라마에서 누구나가 3번은 주인공이 된다. 주변사람들이 오직 나만을 위해서 모이고 관심을 주는 날이다. 태어날 때, 결혼할 때, 죽었을 때다. 이 무리 힘없고 빽 없고 돈이 없어도 이날만큼은 주인공이 된다.    

우리 부부가 세상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2번째 날이다. 남자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여자들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이날 아니면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지도 모르겠다. 사내에서 둘이 사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왜 만인들의 지탄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아내의 사진 속 젊고 예쁜 모습은 유심히 볼 수가 없다.

그 모습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그 모습을 뺏어가 버린 세월에 대한 야속함 때문일 거다.

  


큰애와 둘째의 사진은 유독 많다. 유치원까지의 사진인데 거의 몇백 장을 족히 넘는다. 작품 수준인 사진도 꽤나 있다. 사진을 막 배우던 손위동서가 주말이면 애들을 불러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준 결과물이다. 대형액자까지 만들어서 거실에 걸어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들만 둘인 처형네는 조카들이 딸인걸 보고 유독 이뻐하고 챙겨줬던 기억이다. 지금은 멀리 가버린 사진 속 처형의 모습도 아련하기만 하다.


"여보, 이거 누구지? " 사진을 보다가 내가 종종 아내를 부르면서 하는 말이다.

딸내미 둘이 영아시절 모습을 도무지 구분이 안된다. 너무 붕어빵이라서 구분이 안된다. 사진을 구분해서 폴더를 만들 때마다 헤맨다. 둘은 미술학원, 유치원 등 자라나는 과정을 똑같이 보냈기에 더욱 구분이 어렵다.    



인화된 사진을 스캔하는 작업은 2000년대 초까지 사진들이다. 그 이후는 전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다. 파일로 저장이 돼있기에 별도의 작업이 필요 없다. PC작업을 하다가 수시로 기웃거린다. 꽤나 재미가 있다. 

"아빠, 이게 뭐야? 언제 사진이지?  " 내가 사진을 보다가 가족톡으로 사진을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냥 평범하지만은 않은 사진들이다. 그러면 그때부터 한참이나 가족톡에는 열띤 공방전이 벌어진다.  


PC와 외장하드에는 2003년부터의 사진이 일자별로 폴더로 만들어서 보관돼 있다. 인화가 필요 없는 덕에 순간순간을 스킵할 필요는 없다. 무작정 셔터를 눌렀더니 한 70,000여 장은 족히 되는 듯하다. 중간에 랜섬웨어 덕택에 3년 치 사진을 통째로 날렸는데도 남은 게 이 정도다. 


바이러스의 고통을 겪고 난 후에는 사진을 여기저기 보관하는 습관이 들었다. PC에도 HDD를 꼽아서 위치를 달리해서 저장을 하고, 외장하드나 CD에도 저장을 한다. 요새는 저장매체의 용량이 대형화되는 반면에 가격이 많이 저렴해져서 굳이 큰 비용을 안 들여도 가능하다. 

디지털카메라는 구입한 것만 해도 3~4개가 되는 듯하다. IT 쪽 일을 하다 보니 얼리 어댑터적인 성향이 있어서 디지털 기기를 만지는 데는 거부감이 없었다. 


애들이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부지런히 도 추억 쌓기를 했던 것 같다. 많이 보는 게 남는 거라고, 현장을 보는 게 가장 중요한 학습이라고 여겼던 자녀교육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애들이 중학교를 가면서부터는 사진을 찍는 것을 예민하게 생각하고 거부를 하게 된다. 외모와 복장에 대한 신경을 쓰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대부분이 초등학교까지의 사진이다.     


일일이 사진을 보면서 스캔을 하는 시간

귀찮고 오래 걸리는 시간이지만 여유가 된다면, 아니 시간 내서 한번 해볼 것을 권유하고 싶다. 

새삼 고마운 이들, 내 주위에 있었던 일들을 리마인드 할 수 있는 기회, 내가 잊고 사는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 우리 가족과 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는 모습, 우리 부부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한통의 필름 속에서 슬라이드처럼 볼 수 있었다. 

"어, 나도 저럴 때가 있었네.." ,  "흠, 저때가 좋았는데.." , " 저때가 다시 온다면..."

반면 자녀들은 날이 갈수록 커가고 젊어져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 애들도 엄마, 아빠의 젊음을 먹고 자라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이 모습이 투영되는 자녀들의 인생길에 부모님의 걱정과 근심은 끝이 없었나 보다.

작업을 하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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