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는 요즘같이 다양한 통신수단이 일반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멀리 있는 사람들의 정보를 가장 빨리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전보접수는 115번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고향에서 날아오는 관보(官報, 관공서용 전보)는 청원휴가를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받아 든 "부친사망급래", "모친사망" 등의 간단한 내용의 관보에 얽힌 남자들의 군대이야기는 알고도 넘어가는 단골메뉴다.
전보는 문자수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기에 내용을 축약해서 보내고,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띄어 쓴 칸도 유료다. 보통 10자가 넘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처음 받아 본 전보, 한자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내용을 해독해야 할 경우도 생긴다.
전보중 받는 이들을 설레게 하고 기다려지게 하는 것 중 으뜸은 축전, 축하전보다.
형식이야 시대를 따라서 많이 변했건만 어쨌든 통신수단이 없을 때 희로애락을 전해줄 수 있는 메신저였다.
각종 시험의 합격소식은 그중에서도 제일 받기를 기다리던 전보다.
90년대를 넘어가면서 전화 보급이 일반화되었다. 전보의 본래 메시지 전달기능도 당연히 약화되자 트렌드를 반영한 다양한 형태의 멀티미디어 전보가 출시되었다. 꽃과 그림, 다양한 형태의 멜로디, 선물까지 첨부된 전보다. 이런 전보는 인사이동에 따른 축하인사나, 연말연시 연하장을 대신하는 기능으로 많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내가 결혼식 때 받았던 전보.. 전보의 원시적인 형태다
내가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 당시 흔히들 얘기하는 전화국에 입사한 것은 1986년이다. 한참 전화가 공급되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나 일반화되지는 않던 시기다. 여전히 115번 전보가 활성화되던 시기다.
당시 나는 창구인 영업과에 근무하는데, 한편에는 전보접수창구가 있었다. 같은 영업부 소속이다. 문제는 이 전보접수를 24시간 한다는 것이었다. 방문객이 하룻밤에 많아야 2~3명 정도인데도 말이다. 당시에는 114가 밤새 근무를 했기에 전보접수처리도 같은 부서에서 담당을 했다. 당직근무자가 전보를 칠 손님이 오면 114에 전화를 한다. 그럼 당일 근무자가 내려와서 전보접수를 받고 보내는 방식이었다. 당일 배달을 해야 하는 경우는 전배라는 직군이 있어서 그분들한테 연락을 하면 나와서 배달을 했다.
제주는 관광지다 보니까 밤시간에도 이동인구가 많았다. 뜨내기들도 많았다. 제주에 왔는데 날씨 여건상 못 가는 경우, 여행경비가 다 떨어져서 송금이 필요한 경우, 멀리 있는 가족에게 급보를 전해야 하는 경우 등 이용인구는 많지 않지만 꾸준하게 있었다. 당직을 서다 보면 하룻밤에 2~3건은 꼭 있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당시 114 안내에는 여직원들만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야간근무도 여직원이 한다. 한밤중 전보고객 중에는 주취고객들도 꽤나 있었다. 하긴 한밤중에 전보를 쳐야 하는 경우라는 게 긴급상황이 아니고서는 비정상상황인 경우다. 술 먹다가 술값이 떨어져서 송금을 해달라고 전보를 치는 경우, 사연을 가진 연인한테 보고 싶다고 전보를 치는 경우 등 웃픈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라 한밤중에 여자 직원들이 적극 대응이 어렵고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는 당직자들이나 방호원들이 출동을 해서 해결을 하곤 한다.
얼마 없어서 누구의 생각인지, 지시인지는 모르지만 해결책이 제시되었다.
전보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인 영업부 남자직원들이 매일 1명씩 당직을 서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럼 2주에 한 번씩은 당직을 서야 한다.
전화국은 국가중요시설이고 밤새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기에 당직근무는 꽤나 신경이 쓰이고, 밤새 잠을 잘 수 없음에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젊은 직원들이 대부분 기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2주에 한번 근무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제도적으로 원천적인 보완책을 마련해야지, 당장 급하다고 영업부 남자직원들이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야 되는 게 말이 됩니까?
나는 드디어 일갈을 하고 말았다. 그게 나중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입사 2년 차의 객기(?)였다.
영업부장이 남자직원들을 별도로 회의실에 모이게 하고 심야시간 전보접수라는 현안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의견을 듣는 자리, 아니 통보하는 자리였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정적을 깨고 나는 얘기를 했고, 순간의 정적과 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는 말 그대로 냉얼음이었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해결책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잠잠해질 무렵, 아니 직원들의 머리에서 사라질 무렵이다. 나는 갑자기 발령을 받았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발령이다. 더욱이 가는 곳이 당시는 문제의 기관으로 불리던, 누구나 가기 싫어했고, 신규사원을 발령해 두면 얼마 안 가서 사표만 내던 곳으로 갑자기 발령을 받았다. 나도, 나를 보내는 윗 상사도, 나를 받는 곳의 상사도 모르는 그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한 3년 여가 지날 무렵이다.
나는 여전히 그날 그 일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없었고, 그 일이 이곳으로의 발령과 관계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잊혀가던 때다. 여전히 내 발령을 의문시하던 선배가 본부로 들어간 후다. 나한테 갑자기 전화가 와서 묻는 것이었다.
" 너, 혹시 영업부장이 주재하는 회의자리에서 뭐랜 얘기한 적 있나? "
" 아예, 언젠가 부장님이 전보접수 때문에 남자직원들이 매일 당직에 들어가야 한다고 얘기하길래, 이건 아니라고 의견을 얘기한 적이 있쑤다. 무사 마씸? "
" 너 그 말 때문에 괘씸죄에 걸련 거기로 간거랜 햄쪄 "
이건 뭔 얘긴가?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황당한 일이었다.그말의 충격은 쉽게 가시지가 않았다. 물론 그 말의 사실여부를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알리가 없는 선배이기에 그런 내용의 전화는 나에게 상당히 신빙성 있게 들려왔다. 당시는 그런 일이 있을 법도 한 시기였기에.. 그 일은 30여 년간을 직장 생활하는 내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직장생활의 하나의 가이드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