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창석 Jan 19. 2024

아버지의 빈 술잔(고뿌)

저녁시간 문뜩 반주 한잔이 생각이 난다. 찻장 깊숙이 모셔둔 아버지의 술잔을 꺼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사용하던 하얀색 사기로 만들어진 두툼한 고뿌다.

어릴 적 다시 쳐다보기도 싫었던 아버지의 술잔인데 어느덧 내가 가지고 와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고뿌**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고뿌[일본어]koppu, 명사 → 컵"이라고 나온다. 아직도 북한에서는 고뿌를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다. 조선말대사전에서는 고뿌에 대해 "유리, 사기, 비닐, 알루미늄 같은 것으로 만든 운두 높은 잔"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 아침 인사는 소주 한잔이다. 식전 찻장 한 귀퉁이에 있는 소주병을 꺼내서 하얀색 이 고뿌로 모닝 음주를 한다. 항상 그 위치 그 자리에는 소주 10홉(1되=1.8리터) 짜리 1병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루에 기본으로 3잔 이상은 마셔야 하기 때문에 작은 병으로는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항상 10홉짜리 대병으로 술을 샀다. 사실 그 당시에는 술은 대병으로만 판매하는 줄 알았다. 항상 10홉짜리 대병으로 구매했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지금은 10홉짜리 대병술을 보이지 않는다.

 ----------------

아버지는 워낙 술을 좋아하신 애술가(愛酒家)다. 천생 양반이라 비가 와도 뛰지를 않는 성격이다. 어머니가 마당 멍석에 곡식을 널어놓고 나가면서 비가 오면 거둬들여달라고 부탁을 하고 갔건만, 비가 세차게 내리는데도 안방에 않아서 술 한잔 마시고 책을 읽고 계시는 양반이라고 훗날 어머니가 회상하신다. 술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인 분이셨다. 매일 자주 마시기는 하지만 한꺼번에 많이 마시는 편이 아니어서 음주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없다.  


안주는 필요 없다. 누구 말대로 손가락을 빤듯하다. 술잔을 들어 쭉 빨고 입맛을 다시고는 "캬아" 소리를 내면 끝이다. 안주가 없어서 안 먹는 게 아니고, 안주 가득 술상을 차려 드려도 안주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그런 점에서 술시중을 든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술은 술친구를 안 만나더라도 하루에 기본 3~4잔이다. 아침 인사로 공복에 한잔을 한다. 그리고는 방에서 책을 읽던지, 동네를 한 바퀴 돌던지 하고서는 살짝 다시 찻장 앞에 앉아서 한잔을 한다. 점심시간 1잔이다. 똑같은 루틴으로 저녁과 야식으로 한잔을 하면 하루 일과가 끝이 난다.

매일의 일과 속, 술병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바뀌지만 아버지가 고뿌라고 부르던 술잔을 항상 그대로였다.  

소주 10홉짜리 대병과 아버지가 사용하던 고뿌(술잔)



"창석아" 술이 얼근한 저녁시간 나를 부른다.

"나가 너 먹을 술까지 다 먹고 죽을 테니까 너는 술을 먹지 말라.." 매일 술을 마시는 게 미안했던지 나를 불러놓고 하는 말이다.

"예, 알았쑤다.." 어린 나는 별로 할 대답이 없기에 꾸벅 다짐을 한다.


1988년 6월 어느 날, 회사로 급한 전화가 오고 내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이미 편안한 길을 떠난 후였다.



이젠 재작년 일이다.

아버지 고향에서 마을 향토지를 만드는데 내 고향을 빛낸 인물 편에 아버지 이야기를 싣겠다고 글을 써달라는 요청이 왔다. 집안에 장남이니까 나에게 의뢰를 했던 모양이다. 나는 별 생각도 없이 승낙을 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쓸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쓸게 없었다. 아니 아버지에 대해서 술을 좋아했던 거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고뇌에 차 있던 모습, 낭랑한 목소리로 불경을 읽던 모습, 술 한잔을 마시고 힘차게 붓끝을 휘날리면서 붓글씨를 쓰던 모습이 전부다. 그 이면을 보지 못했다. 왜 술잔을 그리도 사랑했는지를 들어보지 못했다.    


자료를 찾고, 어머니의 마음속 문을 열고, 기억들을 맞춰어 가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기억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단락이 되면서 1장, 2장 A4 3장으로 아버지의 인생을 꿰맞출 수 있었다.


"무사, 삼춘은 갑자기 서귀포 이사 가부런?" 지금도 고향에 가면 뭇사람들이 질문하고 궁금해하는 부분이다. 1960년 아버지는 고향과 정반대에 있는 서귀포로 아무도 모르게 혈혈단신으로 마치 야반도주하듯이 종적을 감춰버렸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의 당시 행동을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었다.

마을에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일을 하던 분이 임기를 마치자마자 사라졌으니 말이다.


내가 어찌어찌 찾고 꽤 맞춘 이야기 속에는 아버지가 그래야만 했던 사연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그렇게 술잔에 녹이면서 살 수 밖에 없었던 삶 말이다.  

       


이제 내 나이가 어느덧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듯 나도 애술가(愛酒家)가 되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내가 마실 술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하고의 약속을 못 지키고 떠나신 게 분명하다.

세상에 술을 전부 마시고 가겠노라고 나와 약속을 했는데,  아직도 술은 지천에 깔려있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특별보호가 특권으로 되어 가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