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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Jan 28. 2024

할머니 집에 있던 댕유지낭의 의미를 알던 날

제주 댕유지로 청을 담갔다




"형님, 댕유지 필요허우꽈? (*제주어 : 형님 댕유자 필요하십니까?)"     


댕유지
제주 토종 유자인 댕유자를 부르는 말로써, 제주어 사전에는 『귤 비슷하되 거죽이 우툴두툴한 아주 큰 유자의 한가지』라고 돼있다.     


"응 어성 못 먹지(*제주어: 없어서 못 먹지), 유자청을 담았다가 여름에 시원하게 유자차로 먹으면 좋잖아….“

"경허민 시간 이실 때랑 옵써, 과수원에 아직 댕유지 안 딴 거 이시난 먹을 만큼 드리쿠다.(*그러면 시간 있을 때 오십시오, 과수원에 아직 수확하지 않은 댕유지가 있으니 먹을 만큼 드리겠습니다)"


이게 오늘 유자청을 만드는 중노동의 시발점이었다. 하긴 한마디의 말에서 시작되는 세상사가 얼마나 많던가?


예전 할머니가 살던 마을 동네 삼촌네 집에는
집마다 1~2가지의 유실수 나무가 있었다.

올래나 무뚱(*제주어: 마당)에 있는 재래종 풋감나무와 집 뒤편 울담을 기대선 제주 토종의 늙은 댕유지나무다. 풋감나무는 갈옷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다. 조그만 감이 열리면 즙을 짜서 밭에서 일할 때 입을 갈옷을 물들이는 데 사용했다. 댕유지는 민간요법으로 할머니 댁에 언제나 있던 일종의 가정상비약이다. 겨울철 감기에 약효가 좋다고 해서 감기 기운이 오면  끓여서 먹었다. 요새는 겨울철에 수확해서 미리 유자청을 만들어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물에 섞어서 먹는다. 더운 여름철 유자청에 얼음을 동동 띄워서 먹는 시원한 맛은 여름철 어느 음료수의 맛과도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댕유지는 제주 재래종으로 야생이라 껍질이 아주 울퉁불퉁하고 못생겼다. 맛은 보통 유자보다는 많이 쓴 편이다. 처음 할머니 댁에서 노란 귤을 발견하고는 무턱대고 먹었다가 인생의 쓴맛을 알고는 뒹굴면서 울었던 기억도 새롭다. 이제는 많이 사라진 제주 농가의 정겨운 모습이다.  



폭설이 내려서 제주가 멈춘 날, 차를 더듬더듬 운전하고 동네 후배가 오라는 곳으로 갔다. 인근에 있는 후배의 감귤밭이었다. 감귤은 전부 수확할 시기가 지난 지라 감귤은 없었다. 보통 감귤은 겨울에 눈을 맞으면 제주에서는 "부꾼다"고 한다. 껍질이 부풀어 올라서 맛이 없게 되는지라 눈이 오기 전에 수확을 하는 편이다.     

감귤밭 창고 앞에는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2그루 유독 눈에 들어왔다. 풍성한 가지를 가진 게 가지 전정도 안 한 듯 보였고, 나무의 수령도 꽤 오래돼 보였다.


"저 열매 달린 게 댕유지낭이우다. 필요한 만큼 땅 갑써(*제주어: 열매 달린 게 댕유지 나무입니다. 필요한 만큼 따서 가십시오)"


후배는 커다란 비닐봉지 2개를 나에게 건네주면서 직접 수확해서 갈 것을 권유했다. 나는 어느 정도가 있어야 유자청을 담글 수 있는지를 모르기에 내게 주어진 비닐봉지 2개에 가득 채웠다. 양손에 들으니 꽤 무게가 나갔다. 잘 먹겠다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니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가 비닐봉지 가득 담긴 댕유지를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와!, 많다. 이렇게 많이 따 왔다고, 너무 많이 따 온 거 아니…?"

"그런가, 나는 모르니까 비닐봉지 2개를 주길래 그만큼만 따서 왔지…."

"이거 엄청 많은 거지, 이렇게 많이 안 주지…. 고맙다고 잘 얘기핸…? 이거 다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들겠는데…." 아내는 기쁨 반 걱정 반이다.


아내는 이내 흡족한 듯 벌써 비닐봉지를 가지고 싱크대로 가고 있었다. 일단은 ①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린 정수에 몇 차례 세척하고는 흐르는 물에 씻었다. 소독이 필요해서라고 한다. 댕유지는 껍질을 먹기에 보통은 무농약 재배를 하는데 그래도 혹시 과수원에 있던 거라 농약이 묻었을까 봐 걱정돼서라고 한다. 소쿠리에 담은 댕유지는 발코니에 2~3일 정도를 두었다.



 


유자청을 담그는 일은 손길이 많이 가는 일이기에 여러 사람이 필요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걱정하던 아내에게 희소식이 왔다. 다른 일정 때문에 귀향을 미루던 아들이 내려왔다. 일손이 보태지고 주말이라 오늘은 미루어오던 유자청을 담가 보기로 했다. 너무 오래 두면 귤즙이 말라버린다고 한다. 몇 차례 유자청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아내지만 너무 많은 댕유지 양에 선뜩 방법을 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단 작업을 하면서 그때그때 고민해 보기로 했다.


먹기 좋고, 보기 좋은 유자청을 만들기 위해서는 댕유지의 외피와 즙, 귤의 알맹이만 필요한데 이것을 어떻게 분리해서 쉽게 발라내느냐가 관건이다. 귤 안에 있는 하얀 껍질(귤락이라고 한다고 함)에는 약효는 많으나 쓴맛이 강하기에 제거하는 편이 좋다고 한다. 또한 여름철 시원한 얼음을 동동 띄워서 유자차로 마시는 경우에 귤락이 자칫 부유물같이 둥둥 떠 있는 모습으로 보일 때도 있어서 보기도 안 좋다고 한다. 이 방법은 외관과 맛을 중요시하는 시어머니가 하는 방법이고, 친정어머니는 약효를 중시하기에 귤락을 포함해서 만든다고 한다. 어떤 방법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소요 시간과 작업의 난이도가 많이 다르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 사항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내는 시어머니에게서 배운 방법으로 담가 보겠노라고 선언했다.



귤락
- 귤 겉껍질 안쪽에 그물 모양으로 생긴 하얀 섬유질을 뜻하는 말로, 정확한 명칭은 '알베도층'이다. 식이섬유, 비타민 C와 항균·항바이러스 작용을 하는 비타민 P가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하고 몸에 해로운 산화작용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의학에서는 독소 배출과 소화 불량 해소 효과가 있다고 보아 약재로 쓰거나 차로 달여 마신다.
[네이버 지식백과] 귤락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아내는 메인쉐프가 되고, 아들과 나는 보조쉐프 아니 조수가 되어서 일단 작업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몇 시간이 걸릴지는 모른다. 단지 울퉁불퉁한 댕유지들이 없어져야 끝나는 일이다. 아들과 나는 아내가 시키는 일을 충분히 보필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시작했다.     

 

② 댕유지의 껍질과 알맹이 부분을 분리해야 한다. 일단 댕유지의 상단과 하단을 칼로 잘랐다. 귤 크기에 따라 껍질 부분에만 6~8칸의 칼집을 내고 껍질을 벗겨내서, 알맹이와 껍질을 분리하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해야 속껍질과 외피를 분리하기 쉬울 것 같아서다. 이건 나의 역할이다.  

       

댕유자의 껍질과 속 알맹이를 분리하는 작업 모습


③ 분리된 껍질에서 순수하게 외피만 도려내는 작업을 아내가 했다.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다. 생선회를 뜰 때 생선껍질과 살 부분을 분리해 내는 것 같은 작업이다. 세밀하고 힘든 과정이다. 조금만 잘못해버리면 내외부 껍질이 섞여서 절단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과연 이렇게 해야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인데 깔끔하고 입에 쓰지 않은 유자청을 먹기 위해서는 감내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고 한다. 물론 인터넷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우리는 이 방법을 선택했다.


➃ 분리된 알맹이에서 귤락을 일일이 제거하고 귤의 알맹이만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해서 탱탱한 알맹이가 들어있는 유자청을 만들면 마실 때마다 톡톡 터트리는 재미와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댕유지와 알맹이에서 귤락을 일일이 제거하면서 알맹이만 추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 방법은 어머니가 소량으로 유자청을 만들 때나 할 수 있는 방법이다. 어머니는 일일이 알맹이를 손으로 까면서 귤락을 제거하고 노란 알맹이만 분리해 내서 만든다. 그럼, 유자청의 맛이 깔끔하고 알맹이가 터지는 맛이 상큼해진다. 사실 이 맛이 최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너무 많은 양을 해야 하기에 아쉽지만, 맛을 포기하고 현실을 택하기로 했다. 가장 간단하게 즙만 사용하기로 했다. 껍질을 벗긴 귤을 압착해서 즙을 짜내는 방법이다. 이건 가장 팔팔한 아들의 몫이다.


➄ 분리된 겉껍질은 가늘게 채로 썰었다. 우리집에서 칼질을 제일 능숙하게 하는 아내의 몫이다. 귤락까지 붙은 부분은 꽤 두툼하고 크지만, 귤락을 도려내니 실제로 귤의 외피 부분은 얕게 남는다. 얕고 가늘게 썰어진 귤 외피는 그냥 한 움큼 잡아서 먹고 싶은 정도다. 마치 떡국 위에 얹히려고 잘게 썰어놓은 계란 고명 같다. 살짝 한 개를 집어서 먹었더니 맛이 제법 쌉싸름하다. 여기까지 하면 귤의 가공작업이 완료된다. 우리 부자의 중노동은 끝이다.



➅ 백설탕과 댕유지 무게를 1:1 비율로 섞어서 잘 젓고 비비는 일이다. 가공된 댕유지 외피와 즙의 양을 측정해 보니 5kg이 족히 넘는다. 아내는 이렇게 많은 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맛이 어떨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아내는 큰 그릇에 채를 썰어놓은 외피를 놓고, 즙을 부은 다음, 설탕을 놓고 섞었다. 나는 옆에서 주방 보조 노릇을 열심히 했다. 섞어 놓고 잠시 있다가 유리병에 담아서 숙성에 들어갔다.


⑦ 잘 섞이고 뜸을 들인 유자청을 관리하기 좋은 유리병에 담았다. 큰 유리병 2개 가득하다. 예전에 냉장고에서 꺼내먹던 자그마한 병이 아니라서 놀랐다. 이제 숙성을 하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



오후 2시가 넘어서 시작한 일이 저녁 드라마를 하는 시간이 되니 마무리가 되었다. 3명이 5시간이 넘게 걸린 것 같다. 3명이 반나절의 품을 들여서 우리가 직접 먹을 제주 토종 수제 유자청을 만들었다. 어렵기도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작업, 꽤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먹을 음식이기에 보람도 있었다.      

  

" 이러니까 수제는 값이 비쌀 수밖에 없어…. 이젠 이 비싼 걸 우리가 마음대로 마실 수 있어…." 아내가 오랜 수고를 덜어주는 한마디를 한다.


완성된 유자청 두병..하단은 물이 아닌 유자즙이다.




여름날 속이 텁텁하고 갈증이 생기는 날, 유자청 두어 스푼에 시원한 냉수와 얼음 몇 조각을 띄우고 마시면 시원함과 뒷맛의 상큼함이 오래오래 지속된다. 항상 기억되는 맛이다.

겨울철 외출 후 목이 간질간질하고 으스스한 날에도 두어 스푼의 유자청을 따뜻한 물에 잘 녹여서 먹으면 이내 몸이 상큼해짐을 느낀다.     


예전 제주 농가 뒤뜰에 있던 늙은 댕유지 한 그루는 병의원과 약국이 많지 않던 시절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주던 선조들의 지혜였다. 어린 시절 겨울방학이면 찾던 할머니 집에서 대청마루 뒷문을 열면 노랗게 주렁주렁 달려있던 댕유지낭의 의미를 지금에야 알 것 같다. 집안 가득 댕유지의 향기가 차고 넘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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