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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Feb 03. 2024

24년 2월, 가족 일정표를 만들면서

월초 새로운 일정표를 만들면서..

달이 바뀌면 우리집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벽에 걸려있는 월중행사 및 계획표를 새로 작성하는 일이다.


먼저 일자별로 빽빽하게 적혀있던 1월의 살아온 이야기를 지운다.

꾹꾹 눌러쓴 일정들은 지우개로 힘주어 지워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 쉽게 지워지면 섭섭할지도 모르는데 힘주고 지우다 보면 지나간 일정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지워진 일정표에 24년 2월로 제목을 붙이고 먼저 잡힌 일정들을 하나둘 메꾸어 나간다. 지금은 휑하니 비어있는 듯한데 이제 열흘 정도가 지나면 꽉 찬 일정표가 된다.


벌써 꽤 오랜 기간 반복되는 월말, 월초의 우리집 주요 의식 행위다.

5명의 가족들은 저마다의 일정이 있다. 일정 중에는 서로가 공유해야 하는 일정, 서로가 알고 있어야 하는 일정, 모두 함께해야 하는 일정들이 있다. 수시로 생기고 변하는 일정들은 가족 모두에게 얘기 하기도 어렵지만 얘기를 한다고 해도 모두 기억하기는 더욱 힘든 일이다. 그래서 몇 년 전 내가 생각해 낸 게 이 방법이다.

벽에 걸려있는 일정표 백보드


"아니 무슨 일을, 얼마나 많다고 일정표까지 걸어?" 처음 일정표를 사다 걸겠다고 내가 말했을 때 아내가 보였던 반응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일정표 작성을 아내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거의 1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문구점에서 날짜 칸과 요일이 그려진 백보드 일정표를 구입했다. 회사 사무실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백보드 일정표다. 백보드는 모두가 잘 보이고 항상 모이는 식탁 옆에 걸어 놓았다. 서로가 일정이 생길 때마다 직접 기록해 놓기로 했다. 아주 개인적인 일정 빼고는 모두 기록하는 게 원칙이다. 본인 일정은 본인이 좋아하는 색으로 기록한다. 가족수에 맞게 5개의 색상이 없어서 중복되기도 하지만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초록색의 보드마커는 항상 비치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물을 마시러 올 때나 식탁에 앉을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정표를 한번 본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일정을 알 수 있다. 오늘 누가 무슨 일로 나가고, 언제 들어오는지 일정을 대충 알 수 있다. 그럼, 서로가 그 스케쥴을 알고 맞춰주면 된다. 외출하는 목적을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다.


" 오늘 저녁은 나 혼자만 남겠네, 뭐로 저녁을 때워야지??" 일정표만 보면 나오는 답이다.


일정표를 처음 사용할 때 여기 적혀 있지 않은 일정은 모르고 지나가거나 무시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모두 다 OK 했는데도 처음에도 이런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아서 시행착오를 경험하기도 했다. 깜박해서 적어 놓치않은 일정 때문에 같은 날 새로운 일정을 잡아버리는 경우다. 이런 일정은 대부분 가족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일정인 경우다. 대략 남감해지는 경우다.  


" 아, 적으려고 했지, 근데 깜박해서 못 적었는데, 어떻게 해?"

대부분 딸내미의 일정이었다. 그 때문에 엄마하고 종종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제는 자녀들이 모두 객지 생활로 출타 중이라 일정표의 주인은 우리 부부뿐이다. 5명이 서로의 일정을 자랑하느라 총천연색이던 일정표가 이제는 검정과 파랑의 아주 단순한 그림판이 되었다. 그래도 우리집 일정표는 열일을 한다. 우리 부부가 주로 외부에서 부정기적인 활동과 일을 하는 편이라 일정이 들쑥날쑥하다. 그래서 항상 꼭 기록해야한다.  


나도 일정이나 스케쥴은 스마트폰의 카렌더에 기록하기도 하지만 주는 가족 일정표다. 다른 식구들과 공유하고 있어야 하고, 알고 있어야 하는 일정들이 많기에 우선 여기에 기록한다. 내가 약속을 잡을 때도 일단 집에 있는 가족 일정표를 먼저 본다.   


월말이 지나서 새로운 일정표를 만들기 전에 항상 전달의 일정표를 스마트폰으로 찍어 놓는다.

그걸 모아 놓았더니 우리 가족이 매달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알 수 있는 역사책이 되었다. 당초는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간편 일기장이다. 내 컴퓨터의 일정표 폴더에 파일이 수두룩하다. 나중에 워딩작업으로 정리를 한다면 우리 가족의 역사책이 될 듯싶다.

가족기록>일정표 폴더를 가득채운 지난 일정표들



2024년이 시작했는가 했는데 벌써 2월이다.

세월은 지치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잘도 달린다. 좀 쉬어가도 좋으련만 무정한 척 관심 없는 척 흘러만 간다.

일정표를 새로 작성할 때마다 "아 벌써 한 달이 지나는구나!" 하고 실감한다. 세월이 흐름을 직감할 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칼라풀하던 일정표에서 색상 수가 점점 줄어드는 걸 보면서, 복잡하고 다양하던 일정표가 단순화되는 걸 보면서 뭔가는 자꾸 없어져 감, 빠져나가는 것을 느낀다. 자녀들이 하나둘 자기만의 일정표를 가지고 나감이다. 이제는 흩어지고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2월 29일이면

이제 새롭게 가득채워 있을 24년 2월의 일정표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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