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화, 수, 목요일 1명씩 제각각 집으로 귀향했다. 각자의 일정이 있고 직장이 있기에 일정을 맞추어서 집으로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연휴때면 비행기표를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열심히 클릭은 한 보람으로둘째가마지막으로 표를 구입함으로서 온 가족이 모일수 있었다. 마지막으로,연휴 바로 전날 둘째가 귀향함으로써 동그라미는 완전체를 이루었다. 물론 공항으로의 픽업은 각자의 일정을 맞추어서 나가야 하는 나의 몫이다.
모두가 모인 첫날은 동그라미 가족 합체 날이라 기념 파티다. 가을 추석 때 모이고 난 후 처음이다.
연휴면 비행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습관성 지연을 한다. 8시 반이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준비를 했는데,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야 모두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기념 파티라고 해야 엄마가 해준 집밥을 앞에 놓고 제주산 한라산 소주 한잔을 비우면서 그동안 담아 두었던 얘기를 하는 정도다. 그러나 오늘은 스페셜 메뉴가 준비되었다. 모두 협찬을 받은 선물이다. 소주 대신 커다란 양주 한 병에 스페셜 안주로 한우구이가 준비되었다.
애들은 아버지를 안 닮았다고 할까 봐 올 때마다 주량이 늘어서 내려온다. 전혀 못 마시던 둘째도 제법 1인분을 한다. 본인은 맥주파라고 주장을 하지만 분위기를 타고 몇 잔은 거뜬하다. 안과 수술을 하고 의사의 권유대로 거의 한 달을 금주하던 아들도 고민 고민 하더니만 술잔을 거든다. 첫째는 바텐더가 된 듯 부지런히 설명 하면서 술잔을 채워준다. 친구가 보내준 한우도 직접 굽고, 싸이드 메뉴도 제법 형식에 갖추어서 만들었다. 개인 접시마다 모양을 갖추고 데코레이션한 정성이 고맙다. 대신에 우리는 모처럼의 분위기를 낼 수 있다. 오늘의 주인공은 아내인 듯하다. 양주라서 독해서 못 마신다고 사양하는 듯(?) 하더니 이내 부지런히 잔을 비운다
내 선친은 술이 없으면 하루가 가지 않는다던 분이다. 말 그대로 애주가였다.
1920년생인 선친이 1988년에 세상을 하직했으니, 그때가 69세다. 나는 29살 때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외부에서 한참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집에서 마신 적은 없다. 어려서인지 선친이랑 술 한잔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워낙 술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그리 긍정적으로만 보지 못하던 나로서는 감히 생각도 못 하던 일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고, 자녀들을 둔 부모가 되다 보니 선친을 생각할 때 가장 후회스러운 일 중의 하나가 선친과 술 한잔을 나누면서 얘기를 하던 추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애들이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첫 술잔을 채워주고, 술 마시는 주법을 얘기해 주었다. 집에 올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자기네들이 살아가는 얘기와 인생의 고민거리를 같이 얘기하고 있다. 식탁에서 같이 반주하면서 술잔을 사이에 두고 흉금을 털어놓고 살아갈 얘기를 한다. 나만이 살아가는 방법이고 우리 동그라미 가족의 가풍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아내도 결혼하고서는 전혀 술을 못한다고 사양했었다. 처가댁 집안 식구 모든 식구가 알코올에 친하지 않다고 알레르기가 난다고 했었다. 그런 아내가 한 모금씩을 하더니, 언젠가는 한 잔이 되었고, 한 잔이 두 잔 되더니 이젠 제법 술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1년에 한두 번은 오버를 하는 모험을 하기도 한다. 이런 날은 흔히들 "날 잡았다"고 얘기를 한다. 오늘이 아내에겐 그런 날인 모양이다.
오늘은 술과 안주 모두 찬조품이다. 첫째의 서빙으로 럭셔리하게 한 상 차렸다.
우리 가족은 순수 소주파다. 특히 제주산 한라산 흰둥이 21년산을 좋아한다.
오늘 주종은 아주 스페셜하게 큼지막한 양주 한 병이다.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는 조카가 술 좋아하는 이모부의 구정 선물이라고, 얼미 전에 만난 딸내미들 편에 보냈다. 보낸 선물은 제때 먹고 감사의 표현을 해주어야 하기에 마시기로 했다.
"이걸 언제 다 마셔? 너무 큰데.. 나는 양주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식탁에 둘러앉은 동그라미들이 제각각 하는 말이다.
"자, 건배..."
"아니 이 술은 굉장히 부드러운데..목 넘김도 좋은데.." 그 이야기를 끝으로 걱정하던 1리터짜리 술병은 하얀 바닥을 드러냈다.
오늘 안주는 첫째 딸 친구의 협찬이다. 부위별로 잘 갖추어진 한우 선물 세트다. 첫째가 직접 한우를 굽고 모양을 갖추어서 서비스까지 보태서 서빙했다. 첫째는 가끔(기분이 좋은 때)은 격식을 갖추어서 요리하고 서빙을 할 때가 있다. 좀 낯설기는 하다. 그러나 요리를 향한 첫째의 세심한 정성과 노력에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놀라기도 한다. 오늘이 그런 날인 듯싶다.
애들 셋은 방금 내려오기 전까지도 같은 집에 살다가 왔다. 그래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쉬지를 않는다.
우리 형제, 남매들은 평소에 말이 없는 편이다. 아마도 구세대여서 그런지, 자라 온 환경이 어려워서 그런지 모르겠다. 꼭 할 말만 하고 필요 없는 말은 가급적 안 하는 편이라 하루 종일 있어도 말이 별로 없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내가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애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잔을 비우고, 채우고, 기울이면서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고 한참을 얘기했다.
우리 부부가 처음 만나던 얘기도 했다. 연애할 때 얘기랑 서로 신경전할 때 얘기까지 남겨 두었던 스토리도 풀었다. 애들은 엄마, 아빠가 이런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해준다고 좋아한다. 자기네들을 이젠 어른으로 대해주는 것 같아서 기쁘다고 한다. 우리 부부가 지나온 삶의 과정을 얘기하는 것은 애들의 인생에 나침반이 되기 위해서다. 부모들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면서 말이다.
"내일 아침 해장라면은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첫째가 내일 아침 해장까지 담당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내일은 전을 부치고 차례를 준비해야 하는데 몇 시에 일어날지 모르겠다. 그래도 즐겁고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