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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석 Feb 06. 2024

서귀포 남도국민학교를 다니던 길

이중섭 거리.. 서귀포 관광극장 앞길의 추억들

지금의 이중섭거리는 내가 국민학교 1학년 시절 학교를 오가던 길, 사연이 많은 눈물 고개다.

내 학창 시절의 첫 출발점은 지금은 사라진 서귀포 남도국민학교다.  

남도라는 교명은 지금의 서귀중앙초등학교의 첫 번째 이름으로 67년 7월 19일까지 사용되었다.

내 국민학교 학적부에는 67년 3월 남도국민학교 입학으로 되어있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선명했던 추억들이 있었기에 아직도 잊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내 호적등본에는 8살 되던 해에 출생신고가 돼있다. 아마 취학통지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학교 갈 나이가 되어서야 늦게나마 출생신고를 한 것 같다. 당시는 비일비재했던 일이다.


주민등록초본을 보면 68년 10월에야 내가 살던 곳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주민등록제도가 68년 11월에 시행됐다고 하니 그때 일괄적으로 등록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전에 중정로 부근 어디엔가 살았던 기억이 있지만 문서상 위치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된 나의 첫 주소는 서귀포 뒷뱅듸, 지금의 매일올레시장 공영주차장이 있는 바로 북쪽이다. 인근에 남주고등학교가 있었기에 남주고등학교 뒷동네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남주고등학교의 울담을 따라서 길게 늘어선 플라타너스와 아카시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67년 당시 항공사진을 보면 뒷뱅듸 부근에는 듬성듬성 몇 채씩의 집들이 보일 뿐이다. 집단주거지가 크게 형성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 기억에 의하더라도 동네는 온통 밭들이었다. 우리 집을 둘러싸고도 가방이 모두 밭이었다. 우리 집 바로 앞 밭에는 산담이 크게 둘러진 무덤도 있었다. 나중에는 산소를 옮겨갔지만, 그전까지는 산담이 동네 아이들의 큰 놀이터였다.   

1967년 / 2022년 뒷뱅듸 항공사진(출처 : 제주지리 정보포탈)


당시는 서귀포시가 아니고 서귀읍이었다. 후에 서귀읍과 중문면을 합쳐서 서귀포시를 만들었다. 서귀읍 중심지에 국민학교는 서귀국민학교(지금의 서귀포초등학교)뿐이었는데, 옛 서귀진성 인근에 자리 잡은 학교로 아주 오래되고 명문의 이름있는 학교다. 주로 솔동산과 지금의 중정로 남쪽에 있는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다. 이후 뒷병듸가 개발되면서 인구가 늘어나자, 국민학교를 추가로 만들었는데 이게 첫 학교인 남도국민학교다.


서귀중앙국민학교는 67년 3월에 개교했으니, 당시에 1학년으로 입학하는 우리 동기생들이 1회 졸업생이다. 그러나 당시 서귀국민학교 2~6학년 재학생 중 일부를 나누어 가지고 오는 통에 우리는 졸지에 6회 졸업생이 되었다.  



남도 국민학교는 행정절차만 밟아놓고, 교실도 없던 시절이라 몇 달간은 서귀 국민학교에서 더부살이했다.

이때가 1967년 3월이었다.

나도 1학년 꼬맹이 시절 뒷뱅듸에서 서귀포항 근처까지 멀고 먼 길을 걸어서 서귀 국민학교까지 다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포탈에서 거리를 재보니 1km는 족히 넘는다.


당시 학교를 오가는 길은 멀기도 했지만, 볼거리도 많았고, 유난히 힘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단, 당시 뒷뱅듸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큰 건물들이 많았다. 서귀 국민학교 정문은 지금과는 다르게 큰 길가로 나 있었다. 학교 정문을 나서서 집으로 오는 길,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학교 북쪽에 바로 붙어있었던 기독의원(현 서귀포여성새로일하기센터)과 당시에는 웅장하게만 보였던 서귀읍 사무소(현 서귀포 자치경찰대)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서귀포 읍사무소 건물은 당시도 멋있었는데 아직도 여전하다. 마당의 큰 아름드리나무도 있었다. 기독의원은 당시 서귀포에서 몇 안 되던 의료기관 중 하나였다. 나중에야 그게 병원임을 알았다.


지금의 이중섭 길 주차장 맞은편에는 당시 유일했던 문방구점이 있었다. 상호도 잊히지 않는 동보상회다. 가게 안에서 봤던 것들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런가 수십 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우리들이 쓸 수 있는 문방구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연필 하나 지우개 하나가 귀중했던 시절 어쩌다 들른 가게에서 볼 수 있는 문방구들은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가 않는 모양이다.  


주차장에서 이중섭 생가로 가는 좁은 길을 들어서면 왼편에 골목으로 큰 팽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컸던 나무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없어진 서귀포극장 바로 앞 언덕은 눈물고개다. 원래 이름은 관광극장으로 나중에 서귀포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금 위쪽 맞은편 동산에 삼일극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서귀포 유일의 영화관이었다. 지금 극장은 폐업했으나 지금은 건물 외관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서귀포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여러 가지 문화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이 길은 유독 경사도가 심하다. 길을 따라 올라온다는 것은 멀기도 하지만 너무나 경사도가 심한 비탈길이기에 마치 산을 오르는 기분이다. 지금도 이 거리를 올라온다는 것은 쉽지 않은 길인데, 당시 국민학교 1학년 아이에게는 어떡했겠는가?

1982년 이중섭거리 조성 전 관광극장 앞 눈물고개다. 언 듯 보아도 아주 심한 경사도가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출처 : 서귀포시청 사진 DB)
지금은 이중섭길로 변해버린 모습 / 서귀포극장 앞(좌상), 서귀포극장 앞을 내려가는 경사로길(좌우), 이중섭 미술관에서 나오는 길로 변해버린 샛길 입구(하)

문제는 힘든 고갯길에는 관광극장 앞을 가로막고 텃세를 부리는 동네 개구쟁이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학교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동네 애들이 길을 막고 통과를 안 시켜주는 것이다. 숫기가 없던 나로서는 이 길을 뚫고 나가는게 쉽지 않았다. 학교를 끝내고 집으로 오는 길, 여기를 무사통과하는 것은 매일 매일의 숙제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샛길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샛길은 지금 이중섭 길 주차장에서 구 서귀포극장까지 올라오는 오솔길로 지금도 예전 길 그대로다. 이 길을 따라 올라와서는 극장 앞에서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튀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중섭거리를 가는 날이면 내가 국민학교 1학년짜리 꼬맹이 시절 여기서 벌였던 활극을 생각하면서 잠시 회상에 젖어 보기도 한다.    


눈물고개를 벗어나면 바로 위에는 서귀포우체국이 있다. 지금은 우체국수련원이라는 간판이 있다.  

거기서 집까지 가는 길은 별다른 기억이 없다. 나를 괴롭혔던 것들이 없기 때문일 거로 생각한다. 힘들었던 일들이 있어야 기억할 게 있는데 그 이후 과정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무난했던 것 같다.


이런 일은 여름방학을 넘어서 67년 10월까지 계속되었다. 

가을을 넘어서면서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서귀중앙 국민학교가 개교를 하고 우리는 이 학교로 옮겨왔다. 새로운 이름으로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우리들의 학교가 생긴 것이다.

일단은 오가는 길이 훨씬 짧아졌을 뿐만 아니라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말 그대로 우리 구역에 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학교를 가는 길이 더 이상 무섭거나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대신 6학년 졸업할때까지 체육시간은 운동장의 돌을 줍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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