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해도 좋을까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 한번 먹는데 히루 이틀 사흘
·········
맨 처음 고백은 너무도 힘이 들어라"
영원한 가객 송창식이 부르는 "맨 처음 고백" 이다.
어제 외출하고 들어오는 길 라디오에서 우연히 흘러 나왔다.
"야 오래간만이네..언제 노래야.." 차 안에서 혼자 중얼거리면서 따라 불렀다.
이 노래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연인은 아니다. 물론 여자도 아니다.
내가 서귀포 살던 어린 시절, 우리집에서 자취하던 분, 청바지를 즐겨 입던 털털한 대학생 형님이다.
이 노래는 그 형님이 손에 익숙지 않은 듯한 통기타를 쉬엄쉬엄 치면서 자주 부르던 노래다. 음치를 막 벗어난 수준의 노래 솜씨에 쉰 목소리로 고개를 쳐들면서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처음 통기타라는 실물을 직접 접한 계기이기도 하다.
아마 내가 중학교에 갓 들어간 70년대 초일 것 같다.
당시에는 서귀포에 제주대학교 농수산학부가 있었다. 우리집에서 100여m를 가면 고등학교도 있었다. 당시 남제주군 관내 읍면지역에서는 서귀읍 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많은 경우 서귀포 시내에 있는 조그만 방을 얻어서 자취 생활을 했다. 몰론 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환경으로 우리집 주변에는 자취방을 찾는 학생들이 많았다.
부모님은 부엌 모퉁이를 돌아가면 나오는 빈 공간에 지붕을 이어서 방을 만들었다. 닥 학생들이 자취방 규모다. 자취생 1~2명이 사용할 정도의 충분한 공간이다. 새 학기만 되면 찾아오는 자취생을 겨냥한 방이다. 지금 생각하면 원룸 정도다.
그 공간을 만들고 첫해 대학생이 이사를 왔다. 옆에 사는 동네 삼춘이 자기네 친정 동네 조카라고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당시에는 대학생이 주위에서 보기 힘든 시대다. 대학생이라는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을 과시할 수 있던 시대다. 이사온 분은 제주대학교 어로학과 4학년을 다니고 있었는데, 털털한 모습에 허름한 청바지를 늘 입고 다녔다. 중학교 때 대학생이 우리집에서 직접 볼 수 있고, 같이 산다는 것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여기에 또 하나 신기함이 더해지는 것이 통기타를 가지고 있었고, 어린 내가 보기에는 통기타를 아주 잘 쳤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틈만 나면 기타를 치는 것 같았다.
부엌너머로 종종 기타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살며시 부엌 모퉁이에 기대어 훔쳐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오라고 손으로 나를 불렀다. 항상 거리감 없이 식구처럼 대해 주었다. 나도 처음 대하는 통기타라 신기했기에 눈치를 보면서 살짝 만져보기도 했다. 점차 친숙함이 더해지자, 기타 치는 앞에 쪼그려 않아서 기타 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기도 했다.
그 경험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도 기타를 배웠다. 어느 정도 기타를 익히고 생각해 보니 그 형은 당시에 기타 코드에 익숙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노래를 부르다 말고는 노래책의 코드 잡는 법을 한참이나 봤다. 그러고는 미어캣처럼 고개를 내밀고 왼손으로 코드를 일일이 짚고는 스트로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때는 기타를 그렇게 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때 자주 목 놓아 부르던 노래가 송창식 씨의 맨 처음 고백이다.
노래 가사를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고백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절절한 노래다. 그게 통기타 소리에 털털한 목소리로 올라가지 않는 음을 울부짖듯 부르는 모습이 어린 내게 멋있게만 보여서 지금까지 각인이 된 듯하다. 그게 한두 번도 아니고 아주 자주 불렀으니 말이다.
당시 공부만 하는 것을 봐서는 형님이 여자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하는 스타일을 아니었기에 맨 처음 고백 때문에 실제로 고민할 일은 없었다. 덧붙여서 불러주는 노래가 "철 지난 바닷가"라는 노래다. 좀 청승맞기는 이 노래도 마찬가지다. 둘 다 송창식 씨의 노래다.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70년대 초반 대학생+ 청바지+ 통기타가 멋쟁이 코드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우리나라 통기타 1세대인 분의 음악을 듣고 산 것이다.
편모슬하에서 여동생과 같이 자랐다는 형님은 당시 대가족이었던 우리를 진정으로 살갑게 대했다. 성격도 소탈해서 5남 4녀인 우리 가족을 마치 제 친형제들처럼 대하고 우리집 일을 마치 자기 일 같이 챙기기도 했다. 당시 어렸던 우리 형제들에게는 그냥 우리집 제일 큰형이자 큰 오빠였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어머님이 있는 제주시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헤어졌다. 그러고는 얼마 있다가 항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이웃 동네 삼춘이 전해주었다. 항해사가 되는 것은 어로학과 학생들의 최종 목표라고 한다.
그 후 결혼하고 항해사로 상선을 타야 하니 부산에서 거주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부산에 우연치 않게 갔던 적이 있다. 예고도 없이 찾고 찾아서 연락을 드렸더니 형수님이 따뜻하게 맞아 주었던 기억은 아직도 잊지를 못한다. 당시에 형님은 출항 중이어서 형수님 혼자였다. 얼굴도 모르고 족보에도 없는 사람이 동생이라고 찾아왔는데 모른척하지 않고 살갑게 대해준 것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서로의 삶이 바쁘다 보니 연락이 끊겼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지 이 노래를 들으면,
50여 년 전 형님의 인자한 모습으로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자동 소환된다.
그게 추억인 듯싶다.
오늘도 맨 처음 고백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자니 그 형님 생각이 머리에 가득하다.
나이가 이제 80이 될 듯한데..
차안에서 잠시 기억 회로를 찾았던 형님과의 추억은 집에 들어와서,
지친 몸을 달래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다.
아침 시간 TV를 켰는데 다시 이노래가 들려온다.
송창식 씨가 직접 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른다.
어제, 오늘 연속으로 이 노래를 듣는 것은 우연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맨 처음 고백은 몹시도 힘들어라
땀만 흘리며 우물쭈물 바보 같으니
내일 다시 만나면 속 시원히 말해야지
눈치만 살피다가 일년 이년 삼 년
눈치만 살피다가 지내는 한평생
에 에~~~~~~~~~~~~~~~~~~ .."
문뜩, 누구를 위한 고백을 그리 망설였는지 들어보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