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뒷병듸 터줏대감이었다. 서귀포에서 중정로부터 일호 광장까지의 넓은 지역을 예전부터 뒷병듸라고 불렀다. 서귀포 성곽뒤쪽에 있는 넓은 평지 지역이라는 뜻이다.
지금의 매일올레시장 공영주차장에는 천주교 복자교회가 있었고, 우리 집은 교회 바로 앞이었다. 서귀읍 서귀 2리 363번지였다가 서귀포시가 되면서 중앙동 278-9번지가 되었다. 지금 올레 시장 북쪽 입구 오거리에서 서쪽(옛 남주고등학교 위치로)으로 80여m를 걸어가면 된다. 지금은 말쑥한 건물에 매일 올레돈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그러니 시장통은 아닌데 거의 시장 인근이었기에 통칭해서 시장통 아이들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었다.
(좌)지금의 모습과 2011년 내가 살던 집의 마지막 모습
기록상으로 내가 그곳에 거주한 것은 1968년도부터 1987년까지 20여 년 동안이다. 국민학교를 입학할 때쯤 이사 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주시에 있는 직장 발령이 날 때까지 그곳에 거주했으니,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묻어있는 동네다. 지금은 낯선 동네가 되었지만, 가끔 서귀포를 가는 날이면 시장통을 가본다. 익숙지 않는 환경이다. 한참을 서서 이것저것을 생각해야만 어렴풋이 옛 생각이 떠오른다.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다. 아무리 변해있어도 내가 20년 이상을 살고 다니던 길이다. 변하고 없어진 것이라도 예전 그 위치를 찾아가면 그 시절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가 살던 집은 대문이 없고, 돌로 울담을 쌓은 슬레이트집이다. 그 지역에서 비교적 오래전 초가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슬레이트로 지붕개량을 하고, 여기저기를 시대에 맞게 보수하면서 살았다. 어느 날 학교를 다녀다오니 집에 전기가 들어왔던 일, 동네 사거리에 공동수도가 있었는데 집 마당으로 수도가 들어오던 날을 모두 기억한다. 집을 돌담으로 쌓으니 수돗가가 노천목욕탕이 되어서 더운 날 마음대로 목욕을 할 수 있었던 기억은 또 다른 의미를 내게 다가왔다. 돌담 동쪽 골목을 들어서면 커다란 폭낭이 있었다. 워낙 큰 나무라 골목 위를 다 가리고도 남았다. 심심하면 폭낭을 올라가서 매미를 잡고 한숨을 자곤 했던 추억이 있는 나무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골목 제일 안에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인 왕국회관"이라는 다소 생소한 종교가 있었다. 지금도 특이하지만, 당시도 워낙 생소한 곳이라 잊히질 않는다. 우리 집 바로 뒤에는 공부 잘하는 선배인 쌍둥이 선배가 사는 집이 있었다. 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다.
집 앞 천주교 옆에는 커다란 밭이 있었다. 지금은 콜라텍과 식당이 있는 3층 건물이 들어서 있다. 밭 가운데는 커다란 산소가 있었는데 산담 위로 뛰어다니면서 놀던 일, 농사가 끝난 밭에서 보리낭으로 숨을 장소를 만들면서 총놀이를 하던 때가 아른거린다. 밭과 교회 울담 사이에는 뻥튀기 할아버지가 있었다. 아침마다 뻥을 외치던 바람에 잠에서 깬다. 할아버지는 미안한지 금방 튀긴 강냉이를 한 바가지 가져다주시곤 했다. 집 바로 옆 골목길에서 석민이, 성돈이, 창엽이 하고 다마치기(구슬치기), 빠짱치기(닥지치기)를 하다가 성돈이 아버지 한테 걸려서 도망치던 일도 종종이다. 성돈이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라 고선생 집이라고 불렀다. 집앞은 잘 정비된 아스팔트 길이지만 당시에는 비포장도로인 적도 있었다. 고무신을 신던 시대라 비포장도로 여기저기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무릎이 까지던 일은 그냥 일과였다. 길에 기다랗게 구멍을 파고 자치기를 하다가 유리창을 깨 먹어서 도망치던 일도 많았다. 온 동네에 있는 모든 것들이 놀이감이었던 것 같다. 바로 어제 얘기 같은데 이제 돌아갈 수 없는 세월이 지나버렸다.
그곳에는 다양한 시장들이 있었다.
어렴풋 한 기억 오일시장과 매일시장이 공존하던 시기도 있었다.
아주 드문 선친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게 오일시장이다. 지금은 철거한 상설시장 자리에 70년대 중반까지 오일시장이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이고, 오일장이 선반내 근처로 옮기기 전이다. 그리 넓지는 않은 면적이었다. 그곳을 통해서 지름길로 나오면 지금의 중정로로 나올 수 있다.
시장이 서는 날 술을 좋아하시던 선친과 함께 종종 찾던 추억이 있다. 이 길로 나오면 선친의 고향 후배가 운영하던 주류 도매상이 나온다. 선친은 아주 애주가라서 동네 후배가 경영하던 가게를 종종 찾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는 내가 항상 동반자가 된다. 가서 술 한잔을 하고, 기념으로 보해소주 대병(10홉) 한 병을 주면 그걸 들고 오기 위해서 내가 동행하는 것이다. 그 건물에는 동아전파사가 있었다. 주류도매상을 하는 분의 매제가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에는 라디오나 전축이라는 게 흔치 않았던 때라 선친이 소주를 한잔하는 사이 그곳을 기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오일장이 서지 않는 날은 매일 시장이었다. 시장의 범위가 지금 같이 넓지는 않았다. 주로 장이 서는 장소는 지금 매일올레시장 내 2개의 사거리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장이 섰다. 물건의 전시나 좌판도 주로 건물 내 점포나, 점포 앞에 천막을 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길 가운데 좌판은 거의 없었고, 필요한 경우는 점포 앞에 주인의 허락하에 물건을 파는 정도였다. 상설시장 앞에는 서귀포 수협이 있었고, 그 옆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수산물 코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길에서 좌판은 대부분 농수산물이다. 지금은 좌판에 다양한 감귤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감귤이 그리 많은 시절이 아니라 드물었다. 사과, 배 등의 과일과 텃밭에서 재배한 농산물이 대부분이었다. 수산물은 서귀포항에서 들어오는 어류들을 가져다가 판매하기에 싱싱한 생물들이 많았다. 고등어, 각재기, 오징어, 쥐치 등은 당시 가장 흔하고 값싼 서민 음식이었다.
1980년대초 매일시장, 큰 건물이 예전 오일시장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상설시장이다. (출저: 서귀포시 사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