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고추농사를 마무리 하면서
봄에 심은 작물의 대미는 여름철 고춧가루를 만드는 일이다.
해야 하는 일이고 필요한 일이면서도 한증막인 여름철이라 짜증이 나기도 한다.
게으른 농부라 하더라도 매년 고추는 심는다. 내가 먹을 양념거리이기 때문이다.
농사 초기, 아내에게 집에서 가장 많이 먹는 것으로 꼭 필요한 게 뭐냐고 물었다. 고춧가루라고 서슴없이 얘기했다. 나도 생각을 해보니 식사 때마다 울긋불긋하게 올라오는 것이 고춧가루가 들어간 음식인 듯했다. 한국음식을 대표하는 양념이 아니던가? 그럼 다른 건 못하더라도 고춧 가루는 내가 직접 만들어서 먹어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마침, 농업기술센터에서 얻어다 심은 고추 농사가 잘됐다. "고추 농사 이거 별거 아니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흔한 탄저병 없이 고추를 수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자신감을 나에게 그냥 던져준 그해 농사 그건 유혹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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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 농사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줄 몰랐네"
"제대로 고추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농약을 치는지..농약 덩어리야, 해보니까 알듯해"
"고춧가루가 비싸다고 했는데 그 가격을 받을 만 해" 매년 고추 농사를 하면서 아내가 중얼거리는 말이다.
우리가 직접 먹을 거라 처음에는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보면 엉망이다. 벌레 먹고 병 걸리고 난리다. 멀쩡한 고추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고추를 따면 아내는 버리기가 아까워서 일일이 상한 부분을 가위로 도려낸다. 건조하려고 농협에 가져가면 직원이 슬며시 웃으면서 한마디 건넨다.
"고생은 했수다마는 이거 건조기에 집어 놓으면 다 타버립니다" 이해는 하지만 하지 말라는 투다.
"고추 농사 제대로 하려면 부지런히 농약을 쳐야 돼, 탄저병은 한번 걸리면 끝이고, 나방 약도 한 달에 몇 번씩 해야주게.." 고추를 건조하는 데서, 방앗간에서 주위 고추 농사를 제법 한다는 이웃들에게 흔히 듣는 소리다. 할 수 없이 나도 1년에 서너 번의 농약을 하기 시작했다. 최소치다. 나머지는 하늘에 맏기는 거다. 자연이 먹다 남겨주는 것만 내가 먹는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다 수작업이기에 바쁘다.
올해는 봄에 고추 150여 본을 심었다. 그리고 제대로 관리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가뭄에, 뙤약볕에 작물이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인 올해 여름이다. 작물의 생명력이란 참 강한 것이다. 날이 가고 달이가서 고추가 열매를 맺었다. 다시 시간이 흐르니 빨갛게 익었다. 수확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부터 할 일이 많아진다. 일일이 손으로 고추를 딴다. 분류하고, 씻고 건조시키고 방앗간에서 고춧가루를 만드는 것까지가 한 사이클이다. 이게 모두 1주일 안에 이루어져야 하기에 바쁘다.
고추 농사를 하면서 건조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처음에는 태양초를 만든다고 햇빛에 말리다가 까맣게 타버린해도 있었다. 후에 안일이지만 농협에서 조합원들이 가져오는 고추를 실비만 받고 건조하는 사업이 있었다. 농협을 이용하면서는 건조하는데 큰 부담을 덜었지만, 모든 농가가 일시적으로 할 때라 예약하고, 일정을 맞추는 게 만만치 않다.
"고추색 잘 나와신 게 마씸, 10근 정도 나왔쑤다"
마지막으로 방앗간에서 만들어진 고춧 가루를 봉지에 담으면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이면 여름날의 고생은 사르르 녹는다.
고생의 보람이 눈에 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춧 가루는 이제 아내의 몫이다.
여러 개의 봉투를 꺼내 놓는다. 주방 한쪽에 있던 저울까지 끄집어낸다.
저울로 일일이 무게를 재면서 평등하게 나누어 비닐에 담는다.
이건 어머니네, 이건 언니네, 이건 동생네... 남는건 우리꺼,
올해 고추 농사가 끝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