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얼마나 보답하면서 살까?

그분의 조문을 다녀오면서

by 노고록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가 많은 것을 주고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주고받는 것들은 여러 가지다. 유형, 무형이기도 하고,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은혜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피해일 수도 있다. 또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 중에서 본인이 은혜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이 은혜를 우리는 얼마나 보답하면서 살고 있을까?



어제 부고 문자를 받았다. 국민학교 동창회에서 온, 동창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알리는 문자였다. 장소가 서귀포의료원이어서 가볍게 읽고 넘겼다. 날짜에 계좌로 조의금이나 보내야겠다 하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서귀포까지는 한라산을 횡단해야 하는 길이다. 왕복 2시간여에 머무르는 시간을 계산하다 보면 족히 3~4시간이 필요하다. 낳고 자란 곳이 서귀포다 보니 일상에서 봐야 할 일들은 대부분 서귀포다. 볼일이 생기면 반은 직접 가고, 반은 계좌로 성의를 보내고 하는 편이다.

요새는 걱정인 게 제주날씨가 겨울을 방불케 하고 있다. 온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가끔 싸라기눈가 날리던지, 자욱이 안개가 끼는 날씨라 밤길 운전에는 최악이다. 그래서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있는 편이다.


한참 다른 일을 하다가 문뜩 부고 문자가 생각나서 다시 휴대전화를 뒤졌다. "아! 이분" 친구보다는 친구의 아버님이 먼저 생각났다. 인자하시고 은은한 웃으시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혼자되시고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어머니도 안부를 자주 물어보시는 분이었다. 소천하셨구나.


예전 제주도의 마을에는 전분공장이 많았다. 마을에서 전분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장님은 그 마을의 유지다. 그분은 전분공장과 몇 개의 사업장을 가져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서귀포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기억한다. 겉으로 보이는 복장이나 차림새를 보면 언제나 깔끔하고, 단아했기에 접근이 어려울 듯했다. 그러나 얘기를 나누어 보면 정이 넘치고, 따스했던 분이셨다. 흔히 말하는 부자의 티가 전혀 안났다.



내가 그분을 접했던 것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다. 내가 스스로 찾아가서 뵌 적은 없다. 친구의 아버지이긴 하나 그리 친했던 친구는 아니었기에 아버지를 만나는 일은 없다. 친구를 만났던 유일한 기억은 친구의 집에서 "바다의 왕자 마린보이"라는 어린이 영화를 보던 일이다. 지금 찾아보니 1970년이라고 한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시절인 것 같다.


그분을 만나는 일은 대부분 어머니와 같이 갔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해결방법을 찾으러 가는 경우다. 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해도 대부분 경제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분은 쉽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면서 해결해 주는 경우는 없었다. 사회적인 물정을 모르는 어머니와 나에게 이런저런 사회적인 시스템을 제시해 주거나, 독지가를 소개해주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안 되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더 어렵게 여겨졌고,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내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은 B급 장학생으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B급 장학생이면 수업료를 빼고, 기성회비를 내야 한다. 크지 않는 돈이었지만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서 어머니와 함께 그분을 찾아간 적이 있다. 어린 생각에 크지 않는 돈이라 그냥 빌려주면 될 듯했는데 그분은 나를 데리고 어디를 가자고 했다. 가보니 그분이 이사장으로 있는 신용협동조합이었다. 당시 금융기관은 돈이 있는 사람만 가는 곳으로 가서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때다. 더욱이 나는 신협의 조합원도 아니었고, 대출이라는 제도도 모르는 시절이다. 그분은 직원을 불러서 뭐라 뭐라 하더니 서류 몇 장을 가지고 왔다. 그 자리에서 그분이 조합원 가입비를 내주어서 조합원으로 가입을 하고 필요한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이 돈은 나중에 내가 취직을 해서 갚으면 된다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용돈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시 사회적 식견이 많지 않았던 부모님을 대신해서 항상 이런 식으로 나를 격려하고 도와주시던 분이었다. 취직할 때까지 새해인사도 가고 종종 들렸던 기억이 있다. 아마 내가 결혼할 때 들려서 축하해 주고, 주례선생님을 소개해주던 게 마지막 모습이 아니었나 하는 기억이다. 본모습을 못 본 지가 30년이 넘었다.



오후 늦게 친구보다는 친구의 아버님이 가시는 마지막 모습을 봐야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미리 가서 조용할 때 조문을 하고 친구를 보고 오로 생각으로 일찍 나섰다. 서귀포로 가는 길 평화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락가락 짓궂은 날씨다.


장례식장은 그분의 생전 경력이나 활동이 화려함을 같이 가져가려는 듯 조용했다.

입구를 둘러싼 수십 개의 화환만이 전광판에 비치는 그분의 모습을 감싸고 있었다. 역시 단아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몇 분 간의 망설임 끝에 들어간 조문실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을 오롯이 대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을 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그동안 찾아뵈지도 못하고, 고마웠다는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진짜 한번 뵈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마지막 가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고 읊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깜깜한 밤길을 달린다.

길을 밝혀주는 불빛이 있기에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곤, 내가 집까지 올 수 있도록 어두운 길을 밝혀주던 불빛의 존재를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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