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와 추억 만들기
오랜만에 공항 픽업 나들이를 했다.
둘째가 갑자기 집이 그립다고 해서 휴가를 다녀가는 길이다. 부부만 있던 집안은 4박 5일 동안 그냥 분주해졌다. 집 나갔던 피앙새가 둥지를 찾아온 느낌이다. 애들이 오랜만에 집을 찾아오는데 뭐라도 해서 먹여야 한다고 아내는 난리다. 오기 며칠 전부터 집안 청소를 하고, 이부자리 세탁도 하고, 마트도 다녀왔다.
"그냥 애들이 오는 건데 좀 편하게 그냥 있으면 안 돼?" 이런 나의 하소연도 필요 없다. 여자는 집에 누구든 오게 되면 신경이 쓰이고 손님맞이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다.
서울에서 같이 살던 딸들은 항상 휴가를 맞추어서 같이 집을 다녀가곤 했었다.
휴가가 아니고 잠깐 다녀가는 길도 대부분 일정을 맞추어 동반을 했다. 오가는 길 동반자가 있으니 공항으로 보내는 마음도 훨씬 덜 섭섭해서 좋았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둘째 혼자다. 올해 큰애가 결혼을 하고 분가를 했기 때문이다. 한 10여 년간을 둘이서 같이 살고, 같이 움직이다가 서로가 독립을 한 셈이다.
내려오는 날, 공항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둘째를 보니 왠지 썰렁하게 느껴졌다. 사실 좀 낯설기도 했다. 항상 둘이서 온갖 몸짓을 하면서 내 차를 멈춰 세웠던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사실 둘째가 혼자 살게 되면서 걱정이 많아졌다.
사람을 좋아하고,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갑자기 혼자 생활한다는 게 어떨까 해서다. 그러나 항상 씩씩한 모습을 보이는 둘째는 오히려 좋다고 한다. 혼자만의 라이프를 살아보는 것도 하나의 로망이었다고 우리를 안심시키려 노력을 한다. 그러나 속 마음은 모른다.
어느 집에나 둘째는 낀세대다. 첫째와 막내사이에서 묻어서 가기 쉽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 부부도 둘째에게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나 하고 가끔은 되짚어 볼 때도 있다. 상처는 주는 사람은 잘 모르고, 받는 사람만 아픈 것이다. 원래 천성이 밝고 명랑한 둘째는 웬만해서는 내색을 잘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
항상 최선을 다했음에도 부족하게만 보이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낯설은 둘째의 나 홀로 휴가길이다
우리들만의 새로운 추억거리를 만들기로 했다.
십수 년 전 내가 퇴직하기 전 다니던 단골 식당을 가보기로 했다. 언젠가 카톡에 올렸더니 둘째가 기억을 하고 가보고 싶다던 곳이었다. 아빠의 추억을 소중히 생각해 주는 녀석이 고맙기도 했다. 소주 한잔을 해야 하기에 집에 차를 세워놓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장장 40분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요새 제주에는 섬식 버스정류장이 생겼다. 전국 최초라고 하는데 도로 가운데에 건물형 버스정류장을 만들었다. 그 정류장에는 양문형 시내버스가 선다. 가는 길 오는 길 모두 그 자리에 버스가 서니, 돌아서서 탑승만 하면 된다.
서울에도 없는 전국에서 최초인 섬식 정류장으로 양문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어쨌든 이 경험은 우리 모두에게 색다름이었고, 40여분을 달려 십수 년 전의 그 자리를 찾아갔다. 그곳은 이미 많은 세월이 흘러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외관은 옛 추억을 소환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메뉴는 그때나 지금이나 단 하나 생선회다. 독가시치, 제주말로는 따치 회 한사라다. 여기에 한라산 노지 21도로 간을 한 소맥이 있으니 우리만의 진수성찬이 되었다.
제주시에는 2일과 7일이면 오일장이 선다.
17일, 때마침 제주시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오일장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핫플을 가보기로 했다. 혹시 많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있었으나 일단 감행하기로 했다. 불길한 예측은 빗나가지 않는 법이다. 기역자로 길게 늘어선 줄이 보인다. 꽤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제주 오일장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맛집인 춘향이네 집이다. 오래 기다려서 먹는다는 것도 또 다른 서사가 있다기에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30분을 기다려서 우리 차례가 되었다. 고기국수에 해물파전을 먹는 시간은 10분이면 족했다. 우리를 둥그렇게 감싸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많은 웨이팅족들의 눈치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한숨을 돌릴틈도 없이 일어서야 했다.
오일장제 점심을 먹고, 다시 1시간여를 달려 와흘메밀축제장을 찾았다.
제주에서는 봄, 가을 두 차례 메일을 재배한다. 이번은 봄 메밀축제다. 추위 때문인지 아직 메밀이 꽃망울을 터트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주 얘기할 때 이번 주면 만개한다 했는데, 또 다음 주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마을주민 20여 명이 마을에 기증해 준 10만여 평의 이 땅은 곶자왈지대다. 마을 만들기를 하면서 마을에서 정리를 하고 메밀밭을 만들었다.
멀리 탁 트인 공간너머로 한라산이 보인다. 메밀밭 사이사이에는 밭담길을 만들어 놓았다. 나지막한 높이에 비툴비툴하게 떨어질 듯 말 듯 불안전하게 놓인 현무암 밭담들이 예전 제주의 마을 그 모습이다. 가다가 지칠 때쯤이면 큼지막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 밑에 있는 벤치는 오아시스다. 울퉁불퉁 농로길을 걸다가 지친 나그네들에게 건네주는 한 모금의 정화수와도 같다. 쉬고 가야 한다. 무릎을 굽히고 메밀밭의 전경을 앵글에 담으려는 순간, 앵글 안에 살며시 들어오는 파란 하늘에 놀란다. 유독 오늘 하늘은 높고 푸르다.
요즘 유심재는 한참 봄의 향연 중이다. 봄바람이 났다.
겨우내 몸을 숨겼던 사랑초가 본모습을 찾았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 올레에서 시작되는 사랑초의 눈 맞춤은 유심재의 텃밭과 정원까지 이어진다. 사랑초는 질긴 생명력으로 틈만 있으면 자리를 잡는다. 텃밭과 돌틈을 가리지 않는다. 엊그제 비가 내린 탓인지 정원 한구석의 장미도 빨간 자태를 뽐내고 있다. 둘째는 오랜만에 유심재 나들이를 했다. 내가 카톡에 올리는 사진을 보면서 "예쁘다"를 반복했다. 제주에 가면 반드시 들려야겠노라고 다짐을 했던 곳이다. 그러니 가봐야 하는 곳이다. 유심재는 봄은 곱다.
사랑초 올레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빨간 장미가 나타난다. 금방 만개한 모습이라 유난히도 아름답다. 둘째는 소리를 지른다. 휴대폰을 들고 장미꽃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다가가더니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후퇴한다. 장미 바로 앞 잔디밭에 동네 고양이들이 불법으로 영역표시를 해놓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유심재에서 동네 고양이들의 배설은 늘 고민거리다. 여러 가지 별의별 방법을 동원했으나 근절을 시키지 못하고 있다.
유독 따스한 햇살이다. 이런 날 집안에 있는다는 것은 자연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오늘은 마당에서 삼겹살 외식을 해야겠다.
"삼겹살을 먹어야 하니 텃밭의 상추를 뜯어라.." 둘째에게 직접 상추를 뜯으라고 했다.
작년 추운 겨울 터널에 심었던 상추는 이제 더운 철이 되어 터널을 제거했음에도 아주 맛있게 이쁘게 자랐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유심재를 만들면서 제일 먼저 갖추어놓은 야외용 탁자지만 본래의 목적에 맞게 이용을 해본 적이 손을 꼽을 정도다. 가끔 커피를 마실 정도였다.
"여기서 삼겹살을 구워 먹은 것은 처음인데..." 둘째가 갸우뚱하면서 던진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정도였던 것 같았다.
아니 그랬기에 더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잠깐 생각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어제 온 것 같은데 벌써 4박 5일이 지났다.
매번 마지막날 아침 일상은 그렇다.
"오늘 비행기가 결항 안되나? 어제 집에 온 것 같은데, 벌써 휴가가 끝이야? 아! 가기 싫어.."
"그럼 가지 마, 엄빠랑 여기 같이 살면 되지..?" 애들은 묵묵히 가방을 챙기면서 갈 준비를 한다.
이런 생활이 이제 10여 년을 넘기다 보니 그저 하나의 일상이려니 하고 대응한다.
이젠 요령과 테크닉이 생겼다.
그래도 녀석들은 마지막 일어서면서 "잘 쉬다 갑니다. 또 올게요."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그래 힐링하고 잘 충전했으니, 좀 견뎌보고... 다시 지치면 와라"
우리만의 마무리 인사다.
이렇게 해서 둘째의 좀 낯설고 어색한 제주 휴가는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둘째는 떠났다.
이젠 집에는 덩그러니 우리 부부만 남았다.
항상 곁에 있을 것 같았고, 품에 있을 것 같은 자녀들이 자라면서 제갈길을 찾아 나선다.
다시 새로운 낯섬들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