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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입영전야를 생각나게 하는 또 하나의 노래

유심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by 노고록

1980년대 선머슴아들의 입대를 앞둔 친구와의 이별가는 최백호의 입영전야다.

그때부터 입영전야라는 말이 일반화되었고, 이 노래는 그날 그 자리에서 친구들과 같이 떼창을 해야 하는 의식곡이 되었다.


"아쉬운 밤 흐뭇한 밤 뽀얀 담배 연기

둥근 너의 얼굴 보이고

넘치는 술잔엔 너의 웃음이

정든 우리 헤어져도 다시 만날 그날까지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


그냥 가사만 한번 읽어보더라도 그대로 앉아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울컥함이 올라온다.

이 노래는 군 입대 전날 밤의 이별가로 1978년 최백호가 만들고 자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직접 부른 노래다. 행진 리듬의 드럼머치에 트럼펫 소리가 어우러진 전주가 마치 진중의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술잔을 들면서 외치는 젊은이들의 마지막 목소리는 한마디의 절규로 당시 젊은이들의 고뇌가 절절하다.

「입영전야」는 당시 검열 수준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고 한다. 박정희대통령 서거 1년 전 서슬이 퍼렀던 시대, 권위와 충돌하는 낭만의 노래였다. 기성세대들에게 반기(反旗)를 들었지만 당시 젊은이들이 어쩔 수 없었던 절망의 내면적 착잡함을 대변하고, 현실 상황을 직시하는 계기를 주었던 노래이기도 하다.


1980년대 입대 영장을 받으면 친구들과의 술자리 명목은 모두 군대 가는 친구 환송식이다. 그러다 한 달 아니 일주일을 앞두고서는 본격적인 입영전야가 시작된다. 막차 버스 시간을 앞두고 마지막 잔을 앞에 놓고 서서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래가사대로 몸과 마음이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이 노래 가사와 멜로디 속에는 군대를 가고 보내는 착잡한 20대 청년들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다. 다른 말을 하지 않다라도 친구를 마치 전장으로 보내는 듯한 우리들의 회한과 아쉬움, 그리움 그리고 아픔이 그대로 묻어있다. 가사는 기승전결의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읊조리듯 가볍고 조용하게 시작하지만 힘 있는 행진곡풍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자, 우리의 젊음을 위하여 잔을 들어라"는 부분에서는 모두 일어서서 잔을 높이 들면서 끝을 맺었던 퍼포먼스는 아직도 울컥한다. 시대의 아픔이자, 고뇌이기도 한 노래다.


또 다른 나의 입영전야의 노래


허름한 레스토랑 창가에서 익숙한 듯 낯선 선배와 친한 친구, 그리고 나 셋이서 들었던 또 다른 나의 입영전야 노래가 있다. 나의 진짜 입영전야, 그날을 연상시켜 주는 노래는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다. 1980년 유심초의 2집 B면의 타이틀곡인 이 노래는 사랑이여라는 앨범 타이틀곡에 가려서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워낙 유명한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아름다운 시구에 멜로디를 입힌 노래로 유명하다.


유행가는 시공간적 의미와 어울려졌을 때 비로소 나의 얘기가 되고 추억으로 남는다. 이 노래가 그렇다. 이미 알고 있는 노래, 익숙한 노래였지만 그날, 그 장소에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래가 나에게 주는 의미를 달랐다. 입대를 앞두고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 불안한 나의 마음을 꼭 집어서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입대로 3년이란 긴 세월 동안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 익숙한 모든 것들과 잠시 이별을 해야 한다. 그 기간 동안 그 모든 것들이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당시 내 내면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표현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djeltj-3.jpg 노래가 수록된 앨범 표지와 풋풋했던 유심초 형제


81년도에 입학을 하고 입대 전까지 2개월여를 나는 집에서 통학을 했다.

5.16 도로 한일여객 마이크로버스를 타면 40여분 거리다. 버스는 높이가 낮아서 남자들은 섰을 때 허리를 펼 수가 없었고, 20여 개 정도의 좌석, 비좁기도 했지만 여유공간도 없었다.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다.


당시 제주대학교는 새로운 캠퍼스로 이동을 하면서 5.16 도로변에 위치를 하게 되자 서귀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갑자기 많이 늘어났다. 강의시간에 맞추기 위해서는 입석여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무조건 제시간에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고,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굽이 굽이 돌아가야 하는 5.16 도로, 오르막 내리막길도 많아서 버스는 항상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우리들은 이 사람과 부딪치고, 저 사람과 부딪쳤다. 처음 한두 번이 미안하고 어색하지만 일상이 되니 부딪칠 때마다 씩 웃거나 고개를 끄덕하면 그만이었다.


그 통학버스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있었다. 국민학교 한참 선배인 여자분이었다. 당시 선배 내 집은 서귀포에서 모두 알고 있는 집으로, 아버님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이라 주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선배는 항상 단정했고, 무표정했다. 풍기는 모습에서 접근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도도했다. 부유한 집의 엄친아 같은 분위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나와는 관계가 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선배였기에 말을 붙일, 접촉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남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고, 지나가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러나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매일 아침 통학버스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른 척, 나중에는 대면대면하다가 어느 날부터는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고 강의실까지 가는 길이 워낙 길다 보니, 그리고 같은 단과대학을 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동선이 같았다. 강의실을 찾아서 이동하다가도 마주치고, 시간을 때워야 할 공강시간에도 마주쳤다. 차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외관상 풍기는 인상하고는 전혀 달랐다. 서글서글하고, 배려심도 이해심도 많았다.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주위를 늘 먼저 챙겨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누구 집 딸이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에 얽매인 보이지 않는 제역이 있는 듯했다. 같이 통학을 하는 내 친구와 선배, 그리고 나 셋은 학교 오가는 길과 학교 내에서 종종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밥을 먹고 차도 마셨다. 그러나 만남은 거기까지였지 학교밖에서의 만남은 없었다. 연배의 차이가 있었고, 주위의 눈길이 있어서 그런지 일체 그런 일은 만들지도 허락하지도 않았다.


"저 5월 26일 날 군대 갑니다" 어느 날 불쑥 던진 한마디에 "고생하겠네"라는 다소 사회학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사회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입대일이 다가왔을 때 친구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군대를 간다는데 저녁이나 먹자는 제안이었다.


무방비상태에서 공격해 오던 노래는 가슴에 맺혔다.


그때 찾았던 곳이 당시 서귀포극장 맞은편 언덕배기에 있던 허름한 건물의 2층에 있던 레스토랑이었다.

지금은 이중섭거리를 만든다고 허물고 길을 내서 그 흔적도 없다. 선배는 조용한 곳이라 그곳을 택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주위눈을 피하기 위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당시 레스토랑을 음악다방이 없어지면서 그 기능을 대신하는 곳으로 변신 중이었다. 뮤직박스가 있는 곳이 꽤 많았다. 테이블마다 칸막이가 높게 쳐져있고, 다소 어둡기까지 했다. 처음 가본 그 레스토랑은 그런 규모는 아니었다. 작고 오래된 조그만 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했다. 늘 만나는 사이었고, 할 말도 많은 우리였지만 그날은 모두들 조금씩은 달랐다. 학교밖에서 만나는 게 처음이고, 나의 입대를 전송해 주기 위한 자리라 그런지 많이 어색하고 말이 없었다.


그때 그 고요함을 타고 흐르는 음악이 있었다.


늘 듣던 음악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음악에서 나오는 분위기나 힘이 달랐다.

힘차고 빠른 전주와는 달리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지만 외로움과 아쉬움이 잔뜩 묻어있는 노래...

"............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가사말이 반복이 되면서 귓가를 맴돌았다.

어디서.jpg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악보

그 어정쩡한 사이, 반복되는 음악을 들으면서 맥주와 식사를 하면서도 얘기는 겉돌았고 끊겼다.

지금 표현으로 하면 조금은 썰렁한 분위기가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건물밖 비탈길에 서서 "고생하라는, 그리고 잘 다녀오라"는 말과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 날이후 나는 그 선배를 다시 보지 못했다.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진짜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노랫말처럼 기약 없는 이별을 한 셈이다.


유심초의 노래에는 그날 그 어색한 분위기가 잔뜩 녹아있다.


가끔 유튜브에서 메들리로 된 70~80년대 음악을 듣다가 이 노래를 듣는 경우가 있다.

별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유독 그날 그 자리가 생각이 나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짧은 3개월여의 만남이었지만 내게는 많은 여운을 남긴 좀 특이한 만남이었던 것 같다.


지금 그 자리는 이중섭거리가 들어서면서 모두가 사라졌다.

최근에는 그 동네 중심이었던 서귀포극장을 포클레인으로 허물다가 주위의 거센 반발로 멈추었다.


내 추억의 장소가 모두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노래 속에 묻혀있는 내 기억은 지울 수 없다.

1981년 5월 어느 날의 추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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